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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연금개혁법 합헌을 보고 생각하게 되는 것
  2023년 4월 14일 프랑스의 헌법위원회는 마크롱 대통령과 여당을 중심으로 내놓은 연금개혁법에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연금개혁법을 두고 프랑스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데요. 시위는 전국적 규모로 일어났고 추산 100만 명을 훨씬 웃도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극좌/극우 야당은 모두 연금개혁법에 회의적이고, 특히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계에서는 이에 전면 반대하면서 총파업을 하기도 했죠.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프랑스 시민들은 연금개혁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총파업과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부터 연금개혁을 주장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를 이후로 개혁안이 보류 상태에 있다가(당시에는 연금수령 연령이 65세였다), 64세로 수정하여 새로운 개혁안을 내놓았고 이것이 올해에 들어서야 합헌이 된 것이죠. 말씀드렸듯 개혁안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정년을 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것입니다. 특히 노동계에서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노동을 시작하는 저숙련 노동자와 저소득층에게 연금 개혁안이 차별적”이라고 비판하고 있고(한겨레 2023.1.12), 외려 “연금체계는 위험한 상황에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연금개혁법을 강행하려고 한다며 마크롱을 로랑 베르제 노동민주동맹(CFDT) 사무총장 역시도 반발했습니다(한겨레 2023.1.12).   프랑스 연금개혁안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1) 9월부터 프랑스 시민들은 2030년 64살이 되는 해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고, 2) 연금을 모두 받기 위해 (노동시간을 통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이 1년 연장되며(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이 시점은 기존 2035년에서 2027년으로 앞당겨집니다(연합뉴스 2023.1.11) 3) 최소 연금수급액은 월 최저임금의 85% 수준까지 인상됩니다(한겨레 2023.1.12). 이 개혁안의 목적은 저출생 고령화사회에서 연금적자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는 “연금제도를 바꾸는 것이 국민을 두렵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연금] 적자가 늘어나도록 놔두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강조하면서 “지금 제도를 손보지 않으면 대규모 증세, 연금 수령액의 감소로 이어져 우리의 연금제도를 위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연합뉴스 2023.1.11).   기사의 날짜를 확인하시면 아실 수 있듯이, 시위는 지난 3개월 동안 멈추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12차의 전국 시위, 교통/에너지산업/학교 등은 노조의 파업으로 마비되기도 했죠(한국경제TV 2023.4.15). 프랑스의 노동총동맹(CGT)이 5월 1일 노동절에도 시위를 벌이겠다고 경고하면서, 이번 프랑스의 연금개혁법은 오랫동안 국제적인 이슈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대선, 안철수 전 대선후보가 사퇴하기 전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놓았던 것이 바로 연금개혁이었죠. 당선 이후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로 연금개혁의 시급함에 대해 역설한 바가 있는데요. “대한민국 미래와 미래세대의 운명이 달린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한국경제TV 2023.4.15), 연금개혁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더퍼블릭 2023.1.15).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연금 고갈에 대한 위기의식은 만연해 있습니다. 국회예산처에 따르면 2039년 국민연금은 적자 전환, 2055년엔 고갈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아주경제 2022.1.25). 하지만 국회 연금특위 소속 민간자문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출범했음에도 위원 간 합의를 보지 못하면서 연금개혁안의 초안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한국경제TV 2023.4.15). 연금특위의 임기는 4월 말까지라 더욱 더 우려가 커지고 있어요(KBS NEWS 2023. 4. 15).    2018년에는 문재인 정부가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 동시 인상을 추진했지만 경영계의 반대와 의지 결여로 실패한 바가 있다고 해요(오마이뉴스 2023.4.12). (*소득대체율이란? 연금가입기간의 평균 소득을 현재가치로 환산한 금액 대비 연금지급액이자, 연금액이 개인의 생애평균소득의 몇 퍼센트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비율. [월연금 수령액/연금 가입 기간의 월평균 소득]의 공식이 적용되며, 소득대체율이 50%이면 연금액이 연금 가입기간 평균 소득의 절반 정도가 된다는 의미. 일반적으로 안락한 노후보장을 위한 소득대체율은 60~75%로 알려져 있고, 2018년 10월 기준 국민연금은 현재 소득의 9%를 납부하고 2028년 이후부터 소득대체율 40%를 보장하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혹시 지금까지 한국의 연금제도를 간략하게 살펴보시면서 현재 당면한 문제를 찾아내셨나요? 2007년 이루어진 2차 연금개혁은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낮췄습니다(2008년에 시작하여 2009년부터 매년 0.5%p씩 낮아지고 있고, 2028년에 40%가 됩니다(오마이뉴스 2023.4.12)). 게다가 한국에서 노동자로서의 정년은 60세, 연금 수급 연령은 65세로 5년의 공백이 존재하기 때문에 연금수급연령을 높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이 상황에서 정부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안은 보험료를 올리는 것이지만 정부에 대한 지지율, 여당의 총선 결과 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것이겠죠. 결국 해결책 중 일부는 2차 연금’개악’으로 인해 40%까지 추락한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데 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 하위 70%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매달 최대 32만원의 기초연금을 수령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KBS NEWS 2023.4.15). 이를 40만원까지 인상하자는 것을 윤석열 정부가 공약으로 내놓기도 했는데요. 이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기초연금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한국의 정년이 60세인데 65세의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기초연금을 준다는 사실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년 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65세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연령대라고 간주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시기의 소득 수준이 기준이 된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이는 한국의 연금체계의 약한 고리를 제대로 드러내 주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합니다.    4월 12일 연금특위 공청회에서는 “기초연금이 하위계층에 더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김수완 강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연금특위 민간자문위원). 김 교수는 “기초연금 급여 인상은 연금개혁과 패키지로 이뤄질 필요가 있으며, 기초연금의 다른 개선사항들과 함께 검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연계해 노후 소득 보장을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KBS NEWS 2023.4.15). 언뜻 보면 틀린 말도 아니거니와 나름 좋은 제안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일괄적인 인상보다는 상대적 빈곤 차이를 줄이기 위해” 라는 애매한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쓸 수 있지만 어디에도 쓸 수 없는 말이기도 하죠. 게다가 연금특위 내부에서는 이미 40만원까지 인상하는 방안에 대해 ‘포퓰리즘’까지 언급하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연금특위의 임기는 이번달 말까지입니다. “연금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금특위 민간자문위가 지난달 말 구체적인 숫자가 빠진 연금 개혁안을 내놓으면서 맹탕 보고서란 비판”(KBS NEWS 2023.4.15)까지 받은 것, 공청회에서 관련 논의들이 공회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연금개혁안이 나올 수 있을까요? 연금특위와 정부가 서로 연금개혁이라는 중요한 사안을 서로 떠넘기고 있는 동안 연금 고갈의 위기,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사적 연금에의 의존 등의 문제는 계속해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2023년 10월까지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KBS NEWS 2023.4.15). 연금특위의 별다른 성과 없이 10월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우리는 이번 정부가 내놓을 연금 운영계획에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부당하다고 여겨진다면 프랑스처럼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하게 될까요? 이번 프랑스의 연금개혁안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이 충격적인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조세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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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토론] '있지만 없는, 학교 내 인권 이야기'
학생이 스스로 자신의 인권을 지킬 수 있는 조례가 있다는 것 아시나요? 바로 ‘학생인권 조례’인데요. 2010년 10월 5일, 경기도에서 지역 최초로 학생인권 조례가 제정되었습니다. 이후 서울, 광주, 전북, 충남, 제주까지 총 6개 지역에서 조례가 제정되었는데요. 최근 이 조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학생인권 조례가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기에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일까요? 학생인권 조례가 제정된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학교 내 구성원들의 인권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현장에서는 "조례는 학생들의 인권을 무조건적으로 강조하고 있어 문제 발생 시 교사들이 아무런 제지나 훈육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권 침해, 다른 학생의 학습권 침해, 학생의 조례 악용 등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며 폐지를 주장하는 입장이 있습니다(충청신문). 또 정서적 아동학대의 기준이 모호하여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생활 지도를 할 수가 없다는 시선도 있습니다(MBC뉴스). 한 편,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인 학생의 인권 보장을 목적으로 제정된 학생인권 조례가 위기에 처했다며, 조례를 폐지하자는 움직임에 대해 '시대착오적'이라는 입장도 있는데요(연합뉴스TV). '학교 내 인권'과 '인권을 보장하는 교육'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으로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고 있습니다(캠페인즈). ? 학생인권 조례 13년차, 학생 인권의 현 주소 현재 한국의 특광역시도 17곳 중 학생인권 조례가 제정된 지역은 6곳입니다. 일각에서는 매우 적은 숫자라는 목소리가 있기도 합니다. 이에 학생인권 조례는 폐지가 아니라, 학생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학생인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채움활동가이자 고등학생인 백호영님은 “조례가 제정된 지역에서도 학생인권 침해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학생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충청남도에서는 학생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학생인권 조례 폐지를 진행하려고 하는 상황에 문제 제기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충남청소년인권더하기). ? 학생인권 VS 교권? 학생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교사인권과 상충하는 것일까요?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전국시민행동 활동가이자 서울지역 고교 교사인 우돌님은 “학생인권과 교권이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교권’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이다. ‘권한’은 개인에게 부여된 것이라기 보다는 ‘공적인 기관’에 위임된 것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교사 개인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라기 보다는 교육 공간에서 ‘공공적으로 주어지는 영역’이 교사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학교가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고 그것이 교사에 의해 표현될 때 학생들은 자신의 인권을 존중하는 교사에게 권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사의 교육활동이 권위를 갖기 위해서라도 학생인권이 존중받는 학교 문화 조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교내 인권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교내의 다양한 인권 보장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이 논의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요? ? 있지만 없는, 학교 내 인권 이야기에 대해 댓글로 함께 이야기 나눠주세요! ? 공론장에서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로 신청해주세요! ✅ 신청 : bit.ly/parti_sc✅ 일시 : 2023년 04월 22일(토요일) 14:30~16:30✅ 장소 : 서울시공익활동공간 삼각지 지하1층 모이다, 다목적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1가 백범로99길 40)✅ 대상 :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더 알고 싶은 시민 누구나(선착순 30명)
자살위기 청(소)년들-'굳이' 살아야 할 이유의 습득 및 제공은 가능할까요?
-실제 자살 사망자가 사망 직전 인스타 라이브를 통해 시청자들과 나눈 대화 일부가 있습니다. 해당 내용에 트라우마가 있거나 내성이 약한 분은 주의해주세요.  원래는 다른 주제로 토론글을 쓰려다, 오늘 아침 지인을 통해 비참한 뉴스를 접한 뒤 착잡한 마음으로 급하게 글을 씁니다. 변명의 목적이 가미됐지만 급하게 쓰다보니 내용의 전문성은 좀 떨어질 겁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목차 1. 들어가는 글 2. 죽지'말아야 할' 이유와 '굳이' 살아야 할 이유 3. '삶에 대한 기대의 제공'의 가능성 4. 맺으며 1. 들어가는 글 "여러분 2시에 뛸게요. 2분 남았어요. (웃음). ... (중략) ... 여러분, 여러분은 꼭 꿈을 찾으시고, 꿈을 찾으세요. 그리고 꼭 꿈을 이루세요. 저처럼 병신처럼 살지 마시고, 인생 허비하지 마시고, 울갤(우울증갤러리) 접으시고, 어 잘 사셔야 해요.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카메라를 어따 설치하면 좋을까요. 어... 참 무섭네요.(웃음). 무서워요 솔직히. 여러분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따가 투신할 때 라방(라이브방송) 킬게요. 애들이랑 전화 좀 하다가. ...(중략)..."  이후 조금 더 담소를 나누다가 휴대폰을 고정하고 "간다?"라 말하고는 실제로 투신했다.  - 2023년 4월 16일 오후 2시 30분쯤 강남구 테헤란로의 한 고층 건물 옥상에서 10대 여학생 A씨가 떨어져 숨졌습니다.  사망한 학생은 직접 인스타 라이브로 자살 시도 전 자신의 '인터넷 친구들'과 담소를 나눴고(이미 자살을 예고했습니다), 자신의 투신 영상을 인스타 라이브로 찍었습니다. 관련 영상은 빠르게 삭제되고 있는듯 보이지만 지금도 검색하면 충분히 시청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사망한 학생이 왜 자살을 단행했는지 그 사정을 추적, 고발하는 글 역시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그 사정과 관련해서도 물론 토론의 주제를 잡을 필요가 있지만, 오늘은 다른 주제로 토론글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2. 죽지'말아야 할' 이유와 '굳이' 살아야 할 이유  "아니 얘들아 솔직히, 이성적으로, 존나, 존나 감정 잡지 말고...나 죽어도 니네한테 피해 좆도 없잖아?" 여러분은 만약 힘들어 하고 있는 주변인이 저렇게 주장한다면 뭐라고 반박하실 건가요? A)종교가 있으신 분은 신을 얘기할 것이고, B)가족 또는 친구를 생각하라고 얘기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권고되지 않지만 C)"나도 힘들다-"거나, D)"죽을 용기로 아득바득 살아라-"라고 얘기하실 수도 있고요. 또는 E)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를 물어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위로, 해소해주고자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F)그분의 손을 잡고 병원이나 상담소로 뛰어가 우울증의 치료를 도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위 모든 시도는 그 사람에게 있어 결국 '나를 죽지 못하게 하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A~F 중 어떤 과정을 통해 당장 그분이 자살을 감행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있어서 여러분 '덕분에 안' 죽었다-가 될 수도 있지만, 여러분 '때문에 못' 죽었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살위기 청(소)년의 입장에서는 자살로 증명(또는 목격)되는 '우리 사회의 실패'를 예방하고자, 또는 그런 '불완전'을 목격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들'의 이기심의 시도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내가 살든 죽었든 아무 상관도 없으면서 그저 가식적인 말들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구하지 말라-를 얘기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인이 저렇게 주장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죽지말아야 할 이유(don't)는 얘기할 수 있어도, '죽고싶은 그가 그럼에도 굳이 살아야 할 이유(won't)'는 얘기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설령 얘기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을 그 사람이 채택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1) 외부로부터의 위험, 예컨대 폭행이나 성폭행, 학교폭력, 경제적 좌절 등에 의해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과, 2) 더 이상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유인을 느끼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1)은 외부로부터의 위험에 의해 벼랑끝까지 내몰리고 내몰리다가 끝끝내, 또는 도피하듯 죽음을 저지릅니다. 이들은 현재의 상태가, 또는 그가 바라보는 미래가 괴롭고 힘들고 수치스러워서 차라리 죽음을 저지릅니다. 이 사람들은 사회가(우리가) 도울 수 있었는데도 도와주지 못해 '놓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살의 예방법으로는 사회안전망 따위의 제도를 발전시키고,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것과 가해자를 처벌하는 정도와 밀도를 강화하고,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는 태도를 체화하는 노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2)는 다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이유가 아닙니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득바득 일해서 살아내고자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 몸이고 내 권리, 나는 그냥 죽으련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울증 치료를 권하는 걸 '나를 기어코 못 죽게 하려는 시도'로 읽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2)의 사람들도 처음부터 죽고 싶어하는 유전자를 강하게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테고, 그러므로 2)의 상태에 놓이는 걸 막는 방법들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은 이미 시도 또는 노력되고 있고, 대개 사후적인 조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2)의 상태에 놓이는 사람들은 분명히 앞으로도 발생하고, 그때에 그들에겐 사후적인 조치는 대부분 '헛소리' 내지 '간섭'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나를 삶에 묶어두려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사람들, 삶에 질린 사람들, 주변의 "삶에 남으라-"는 호소를 '팩트'로 비웃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기대를 제공하는 방법이란 게 과연 가능할까요? 이 질문이 이번 토론글의 핵심입니다.  3. '삶에 대한 기대의 제공'의 가능성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ㄱ) 교육입니다. 우리나라는 의무교육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사람의 목숨이 가지는 숭고함'이라던가, '나의 죽음이 타인에게 끼치는 악영향'  또는 '삶의 철학'따위를 교육하는 겁니다. 이른바 가치관의 확립을 도모하자는 건데, 저는 이 방법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우선 '삶에 대한 기대'라는 가치를 국가가 교육이라는 제도로 획일적으로 주입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삶에 대한 가치'라는 건 개인이 생애를 살아가면서 스스로 주조해내거나 다른 곳으로부터 채택하는 거지 교육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종교를 가짐으로써 삶에 대한 어떤 사명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ㄴ) 주변인들과 또는 혼자서 사회에 놓여있는 다양한 콘텐츠들을 향유하며 '재미'를 느끼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ㄴ)의 콘텐츠들은 화폐 등을 교환해 소비할 수 있고, 화폐 등을 얻기 위해 탄생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콘텐츠 개발을 나라나 지방정부가 지원하고, 그런 콘텐츠로의 접근과 소비를 진작하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이를 위해 탈상품화 정도를 높이고 가처분소득을 늘리거나 바우처의 형태로 소비를 지원해야겠죠. 기본소득이나 참여소득을 지지하는 몇몇 주장이 이런 내용을 담고있죠.  ㄷ) 보다 끈끈하고 정다운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소외나 고립 따위의 현상을 예방하기 위해 개인들을 더 자주 사회에 노출되거나 나오도록 기획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몇몇 조례들이 제정되고 있죠. 광주를 선두로 다양한 은둔형 외톨이 지원센터가 설립되는 건 이런 시도의 한 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https://gjtory.kr/).  ㄹ) 자기 삶에서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않아 '무료한' 또는 '부끄러운' 사람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무런 직업도 없는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에게 주민자치경비의 형태로 역할을 수행시킨 결과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소논문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논문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 어떻게보면 ㄴ)과 ㄹ)은 같은 갈래로 묶일 수도 있겠네요. 애초 ㄴ)의 콘텐츠에는 시장이나 공공에서 공급되는 '물건'이나 '서비스'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과 창출해내는 '경험'일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서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게 '부끄러운' 이유는 사회가 '생산적 인간'을 강조하고 '잉여인간'은 멸시하는 구조가 작용하는 것이니 ㅁ) '생산적 인간'을 강조하는 흐름에 대한 비판 및 개혁도 간접적이나마 삶에 대한 기대의 제공을 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더 떠오르는 방법이 없습니다.  위 방법들 중 ㄷ)ㄹ)은 '인터넷'의 존재가 있어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개인은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기 방 안에서 인터넷을 통해 다른 이들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교류를 발전시켜 실제 친구들을 만들 수도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을 통한 친구관계는 A) 범죄 따위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고, B) '많지만 느슨한' 관계에 머물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많지만 느슨한 관계의 인간관계는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부를 수 있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4. 맺으며 사실 '삶에 대한 기대의 제공'을 얘기했지만 그 기대는 개인이 스스로 살아가면서 주조하거나 채택하는 꿈입니다. 이 '꿈'은 개인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꿈의 기획에 제약이 걸릴 겁니다. 가) 자본주의 사회냐 공산주의 사회냐 사회주의 사회냐, 나) 남자냐 여자냐 성소수자냐, 다)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 라) 부자냐 빈곤층이냐, 마) 가족이나 주변 지역사회의 구성과 성질은 어떠하냐 등등. 저는 여기서 가)와 라)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꿈을 기획하며 살아가고 있을텐데,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획할 수 있는 꿈의 성취는 '자본' 또는 '노동'이라는 틀, 도구, 경로를 반드시 필요로 할 겁니다. 비유하자면 그 어떤 요리사라도 식재료 없이 자신만의 요리를 기획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옹호하면 옹호했지, 그 스스로의 붕괴를 초래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평등을 옹호하는 체제는 아니죠(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평등을 옹호하는 체제 속에서 개인들이 그 체제의 제약을 뛰어넘는 꿈을 기획하는 게 가능할까요? (가능해야 할까요?). 이 문제도 더 고민해 보고 싶지만, 저는 아는 게 거의 없어 이만 여기서 글을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의견 주시면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일부 내용이 누락되어 2023.04.24.월요일에 추가했습니다. 2번 목차에 원래는 사망한 학생의 말이 있었으나, 현재 영상을 찾을 수도 없고 내용도 기억나지 않아 유사한 문장을 따로 썼습니다).
새 이슈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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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교육과정에서 대학준비학교의 분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학이 주도하는 이상한 나라의 대입개편  교육부는 2023년 상반기까지 대입제도 개편안 시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부터 올해 2월까지 네 차례에 걸친 <2028 대입개편 전문가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앞의 세 차례의 토론회 뿐만 아니라 ‘미래형 대입전형과 수능의 개편 방향’이라는 주제로 논의한  제4차 토론회의 5명의 발표자 중 단 1명만이 현직 고교교사였고, 나머지는 대학교수 및 대학 입학 관계자들이었습니다.  제4차 2028 대입개편 전문가 토론회 포스터, 교육부 우리나라 교육계의 가장 큰 화두이며 우리 아이들을 입시 지옥으로 몰아 가고 있는 대입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그 제도로 인해 가장 많은 고통을 받고 있고, 그 변화를 가장 크게 실감하는 고교 교사와 학생들과 학부모의 의견보다는 대학 입학 처장의 목소리가 더 많은 대입개편 토론회의 모습이 과연 정상적인 걸까요? 대학의 신입생 선발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한 중등교육을 받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고등교육으로 잘 진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대입제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입제도로 인해 파행이 자행되는 고교과정  대입제도 개편을 대학의 입장이 아닌 중등교육 현장의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학교교육 정상화를 위하여 2014년 9월 12일부터 ‘공교육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약칭 ‘공교육정상화법’)’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이 법은 학교교육의 파행을 막고 공교육을 정상화 하겠다는 정책적 의지를 법제화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법이 가장 지켜지지 않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의 고3 교실입니다.  사진: Unsplash의 Alex Simpson 고3 2학기에 수시와 수능을 준비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모든 교육과정은 고3 1학기나 그보다 더해 고2까지 끝내고 시험일이 임박해서는 주로 실전 문제 풀이 수업에 집중 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파행적으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운영될 수 밖에 없습니다. 3년을 배워야 하는 교육과정을 2년 반으로, 짧으면 2년 안에 다 끝내야 하기에 제대로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없고 선행학습을 부추기는 교육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철저하게 대학입시에 맞춰져서 운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수업을 진행하기는커녕 등교를 하지 않아 교실에는 10명 남짓 아이들만 앉아 있기도 하고, 다들 엎드려 자거나 유튜브만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학생들은 이미 수능을 본 뒤라 수업 자체를 들을 마음이 없기에 수능 이후의 학사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10대의 우리 아이들의 소중한 시간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낭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이러한 심각한 대입제도 문제의 대안 하나를 영국의 대입 제도로부터 가져와 보고자 합니다.  대학입시교육이 완전히 분리된 영국의 교육과정 영국의 학제는 1~11학년까지 초·중등 교육과정이 있고, 그 이후에 대학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위한 12~13학년의 대학준비학교인 Sixth Form College 과정이 있습니다. 11학년까지는 대학입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교육과정이 진행됩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다양한 과목들을 배우면서 경쟁없이 즐겁게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11학년에 올라오면 GCSE(General Certification of Secondary Education: 중등교육자격시험)을 보는데 이 시험은 학문의 기초이론보다는 ICT나 사회교육 등 실제 사회적응에 필요한 실용적인 측면을 보다 강조하고 있으며 여러번의 시험 기회를 주고, 졸업 이후에도 다시 시험을 칠 수도 있습니다.  성적은 등급으로 발표되며, 등급은 A+부터 G등급까지 나누어지는데 여기서 국어와 수학이 C등급 이상만 받으면 취직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국어와 수학만 C이상이면 대학 입시를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GCSE의 등급이 우리나라의 내신처럼 대학입시에 반영되지도 않습니다.  사진: Unsplash의 Marcin Nowak 중등학교 수료를 한 후에 16세 이상의 학생이 대학 입학을 위한  A-level 시험에 필요한 소수 과목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코스가 바로 Sixth Form College인 대학준비학교입니다.  A-level은 일반적으로는 3~4개의 희망 대학 전공과 관련한 과목을 고르는데 어떤 대학은 1과목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선택한 과목을 2년동안 여러 번의 시험을 쳐서 합산을 하는데 각 시험은 반복 응시가 가능합니다. 최대 4과목을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 중 1과목이 너무 어려우면 나중에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국어, 수학, 생물 외에 경제학, 사진학, 법학, 심리학, 사회학, 의상디자인, 요리, 컴퓨터, 비즈니스, 음악, 제2외국어, 디자인 테크놀로지, 연극/드라마, 체육 등 다양한 선택 과목이 있습니다.  자신이 희망하는 대학의 학과에서 요구하는 과목 1~2개를, 그리고 나머지 과목은 자신이 원하는 과목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치대학을 가려는 학생들이 생물학, 화학 등의 관련 과목을 공부하고 나머지 과목은 심리학과 같은 과목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경제학과에 지원자는 학생들은 경제학이나 수학을 공부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법대나 인문학과는 필수로 요구하는 과목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수험생이 좋아하고 잘하는 과목으로 모두 선택할 수 있습니다. 수능 시험에 나오는 국·영·수, 사탐/과탐, 한국사, 제2외국어/한문을 어쩔 수 없이 모두 공부해야 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에 비해 영국 학생들은 3~4개의 소수 과목만 집중적으로 2년동안 여러번의 시험을 치며 공부하기에 학생들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고, 또한 대학의 학과 공부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목을 필수적으로 배워와서 고등교육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공교육 정상화가 실현되길.. 이렇게 중등교육과정에서 대학준비학교를 분리하게 되면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단지 대학 진학만을 위한 교육으로 전락해서 파행적으로 이루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공교육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여 고등학교 과정에서 진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대학 전공 공부를 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소수의 과목만 공부하여 학생들의 시험 부담을 덜어 줄 뿐 아니라 대학 전공과목의 전문성도 향상 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  - 영국 교육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은영저  - 한국인 영국교사가 말하는 진짜 영국 교육 이야기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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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담론 세미나(1) - 정책설계 관점으로 정의하는 청년
안녕하세요? 시민36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청년’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 청년도 있고 아닌 분도 있을 텐데요. 저는 많은 청년들과 함께 활동하는 현장에 있다 보니 청년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가끔 저에게 ‘요즘 청년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저도 궁금 하더라구요. 먹고사는 게 분명 어렵긴 한데,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들여다볼 엄두가 안 났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 혼란을 헤쳐보자는 의지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청년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 함께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청년을 찾았나 지난 2022년 대선 즈음부터인가요. 어느 순간부터 청년 정치, 청년 정책, 청년 고용, 청년 불안 등 대부분의 사회문제 앞에 ‘청년’이 붙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청년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공정’ 이었는데요 (요즈음의 청년 키워드는 ‘불안과 고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 사회가 드디어  이런 문제가 더 이상 청년 개인의 것이 아님을 깨달은 거 같습니다. ‘노력을 더 많이 하라’는 낡은 언어로는 청년세대를 어르고 달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걸까요. 청년세대의 불안과 불평등이 점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청년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과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2022년 대선 선거 시기에 맞춰 본격적으로 청년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본격적으로 2022년 대선 공방에서 거대 정당들은 각자 청년정치인들을 영입하고, 정확히 정 반대의 전략으로 전쟁을 치뤘지요. 이 대결 구도에 많은 담론과 가치가 희생됐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희생은 ‘젠더와 불평등문제의 본질’ 입니다. 이대남, 이대녀 프레임으로 ‘젠더 폭력’은 ‘젠더 갈등’이 되었고, 인권을 바라보는 관점과 불평등 문제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거대하고도 공허한 외침에 휩쓸렸습니다. 대선시기에  기성 정치인들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활약했던 청년 정치인들이 대선이후 정치권에서 배제되고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이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청년’ 정의하기 서두가 길었지만 요지는, 청년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만큼 정치권에서 청년문제 해결을 위해 이런저런 전략 보고서들을 발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22년 경제인문사회연구소에서 청년정책의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과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주관 ‘청년정책의 패러다임과 전략과제 연구. 2022) 청년의 정의, 청년정책 평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 등을 제안하는 보고서인데요.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나누고 싶어서 이번 글을 준비해 봤습니다. 우선 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보고서에서는 청년을 네 가지 유형으로 정의합니다. 사전적 정의, 사회과학적 정의, 법적 정의, 그리고 청년의 사회경제적 의미입니다.  사전적 정의는 말 그대로 청년의 국어사전 풀이입니다. 한자 그대로 ‘젊은 나이’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청년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1898년 도쿄 유학생 잡지입니다. 1989년 ‘청년애국회’ 사건 이후에 청년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했고 1903년 YMCA(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강준만, 2008년) 1920년부터 문화운동의 주역으로 청년을 부각시키는 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청년은 ‘새로움’, ‘신문명 건설’의 이미지로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성세대와 그들의 가치관과의 단절이 청년 정의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청년은 연령적 정의가 아닌 사회적 맥락에서 정의해야 한다는 함의를 갖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시작된 문화적, 역사적 차원이 아닌 사회과학적 차원으로 청년을 정의하는 흐름은 서구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청년을 성인으로의 이행(transition to adulthood) 과정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즉 청년은 ‘이행의 과정 속에서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닭으로 비유하자면 병아리와 닭 그 사이. 푸르스름한 털갈이하는 어중간한 닭으로 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어떤 지점에서 어딘가로 ‘이행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독립’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로부터 경제적, 물리적 자립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관점으로 청년을 생각한다면 청년의 연령이 유동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독립/자립이 늦어지고 있는 시기니까요. 법적 정의로서의 청년은 심플합니다. 2020년에 시행된 청년기본법에 따르면, 청년은 19세 이상 34세 이하인 사람입니다. 정책을 적용할 때 연령에 따라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등 분명한 기준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가장 간편한 연령에 따른 법적 정의를 채택하지요. (국가법령정보센터 청년기본법) 그러나 이렇게 연령에 따른 일괄적인 청년 정의는 다양한 청년의 삶과 모습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했듯, 청년 이행과정이 늘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독립 준비가 안됐는데 35세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청년정책을 적용받지 못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지요.  청년의 사회경제적 의미로서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 결이 있습니다. 생산과 소비 주체, 혁신의 주체, 부양의 주체, 정치적 효용의 주체, 인구학적 효용의 주체입니다. 사회·경제·정치 측면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서 소비·생산, 인구부양, 정치혁신 등 다양한 역할의  주체로서 청년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어쩐지 어깨가 무겁네요.)  보고서에서 정의하는 청년 외에도 마케팅적 관점으로의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MZ’인데요. 어쩌면 ‘청년’보다 더 익숙한 ‘MZ’라는 호칭은 청년층을 타게팅한, 콘텐츠 시장에서의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입니다. 이 호칭이 청년을 호명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부정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면을 극대화하여 청년 전체에게 덧씌우는 방법으로 결국 ‘자기주장이 (말도 안되게) 강하고, 힘든 일은 맡지 않으려는’ 이미지로 굳힌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행하는 청년, 표류하는 청년정책 다양한 청년의 정의를 이해하고 나니 저 스스로를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청년입니다.) ‘나는 이행기를 거치고 있는 병아리와 닭 사이의 존재구나.’ 이러한 자기 정의로 스스로의 위치와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 새로운 의문이 들었습니다. 생애 주기의 궤적 속, 어딘가로 이행하고 있는 청년이여. 우리는 ‘어디로’ 이행하는 중인가요? 청년의 이행은 주로 부모로부터의 물리적,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노동하는 삶으로의 입문이 됩니다.  또 사회에서 중요하게 부여하는 가치 중 하나는 ‘결혼과 출산’이지요. 그렇기에 청년 정책에는 주거, 일자리, 그 다음으로 결혼장려 정책 비중이 가장 높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청년정책중 ‘출산장려정책’ 만큼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 이야기할 순 없으니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이미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다 시피, 청년 이후의 삶의 모습은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년정책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보고서에서는 전반적으로 청년의 이행기에 필요한 물적, 경제적 지원 정책을 강조합니다. 실효성있는 지원을 위해 이행기에 나타나는 청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파악하고 그변화하는 모습에 빠르게 정책 지원을 맞추는 것이 핵심임을 역설합니다.  이 외에도 청년의 다양한 삶의 반영하기 위해 각종 간담회, 연구, 토론회 등의 활동들이 이뤄지고 있는데요. 저는 해당 연구 보고서들을 부지런히 팔로우 할 예정이랍니다. 이놈의 청년 정책 담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같이 지켜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음 글을 준비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글의 주제는 ‘갓생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이 글은 청년활동가들과 진행하는 세미나에 활용하는 ‘발제문’에 내용을 추가한 글입니다.  *청년 담론 세미나를 진행하는 시기동안 릴레이 형식으로 원고를 개시할 예정입니다.
(책과 함께 시리즈. 1) 국민 vs 시민, 여러분의 선택은?
🦋책과 함께 시리즈는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질문 혹은 고민들을 혼자서만 생각해보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이야기 해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시리즈입니다.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눠보아요.? 국민 여러분,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가끔씩 '국민'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때가 있다. 그럴때 무엇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무언가 내 속 저 깊이 거북한 불편함?이 존재하기도 했는데 책에서 본 글을 보고, 아 어쩌면, 그 불편함의 일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어졌다. <책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p225~p226,백승종 지음. 도서출판 들녘> "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나 국민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해요. 대통령도 '국민 여러분!'이라고 부르면서 말을 꺼내기 일쑤지요. 그러나 저는, '국민'이란 말은 하루빨리 폐기 처분하는 것이 좋겠다고 봐요. 서구 여러 나라에서도 '국민'이라는 표현은 없는 것 같더군요. 국민, 즉 국가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국민이라 부르는 법이 없고, '시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죠. 알다시피 우리가 쓰는 '국민'이라는 용어는 따지고 보면 매우 불쾌한 과거와 직결되어 있어요. 국민이라는 말이 실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준말이라고 봐야해요. 일본은 천황제 국가여서 '황국'이라고 하고요. 그것을 줄여서 '국민'이라고 불렀고요. 과거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어요. 황국신민을 기르는 학교란 뜻이었지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국민학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아직 멀쩡한 시민을 여전히 국민이라 불러요. 좀 이상한일 아닌가요?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여전히 국민이란 말을 사용하는군요. 한국이란 국가가 있으니까 국민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봐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국가의 구성원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이죠. 국민이라는 말은 설사 '황국신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해도,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우리 같은 약소국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보았어요. 국가에 속해 있음을 강조하는 용어니까요. 국민이란 용어는 시민의 자유와 시민의 자율성과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언어적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우리는 국가에 얽매인 존재라기보다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공유하는 자유로운 시민이라고 봅니다. 시민적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질문1> 여러분들도 국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때 불편한 느낌이 있으신가요? 시민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이신가요?    <질문2> 국민이란 단어의 유래가 황국신민이라는 저자의 말, 팩트일까?   <질문3> 시민이라고 했을때 '시'도 국가보다 작은 규모의 소속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혹자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북한에서 사용하다보니, 우리가 못쓰게 되서 아쉽다고 하기도..) '책과 함께 시리즈'는 질문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시선과 생각에만 갇혀있는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가보고 싶습니다. 그런 너머의 순간들이 조금 더 많아질 때, 나 그리고 우리가 조금 더 평화로운 순간을 자주 만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이 그 너머의 순간들을 만들어보시지 않을래요?  그렇다면, 댓글로 여러분들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한국도 '시위하는 초등학생'이 나올 수 있을까? - 비대학 청년이 이야기하는 교육문제
안녕하세요? 시민36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교육개혁에 관심이 많은 동료 H와 나눈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준비했습니다. 동료 H는 비대학 청년으로 극단 활동부터 개인 사업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고, 사회이슈에도 관심 갖고 목소리 내는 친구인데요. 이야기 주제는 ‘비대학 청년에게 묻는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입니다.  *캐주얼한 느낌을 위해 격식체가 아닌 대화체 그대로 옮겨보았습니다. 시민36 : 대학 진학을 안 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었어? H : 우선 별로 관심이 없었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도 아니었고. 어느 수도권 대학에 붙긴 했는데 개인 사정으로 일이 꼬여서 결국 진학을 못했어.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게 온전한 자의적인 선택이라기보단 어쩌면 외부적 요인도 있긴 해. 그런데 어쨌든 대학 진학을 끝까지 하지 않은 건 대학에서 하고 싶은 공부가 따로 없었던 것도 있어.  시민36 : 보통 4년제 대학에 진학하면 최소 평균 5년은 대학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어? H :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말에 꽂혀서 한 6년간 경험을 찾아 떠돌아다녔어. 3개월 단위로 어떤 알바나 일을 전전하는 시기도 있었고. 사실 여러 경험을 찾아 다니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  (참고로 H는 사회운동부터 공간 운영 사업, 대안교육 연구, 연극단 활동, 연극배우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현재는 새로운 직장에서 영업직 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민36 : 대학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  H : 다양한 경험을 다른 또래 친구들에 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장점이라고 생각해. 왜냐면 우리는 독일 사회와 비교해서 원샷 사회라고 할 수 있어.(H는 독일의 교육제도에 관심이 많습니다.) 흔히 수능 성적으로 미래가 결정된다고 하잖아. 학창 시절에는 수능 공부에 매진하느라 진로를 탐방할 기회가 거의 없고, 원하는 대학 커트라인 맞춰서 진로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지. 나는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다채로운 꿈을 꿔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거든.  시민 36 :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뭐야? H :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야. 일을 하는 경험 속에서 마음이 동하는 경험이 있었어. 어떤 울림 있는 진정성 있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동하는데, 내가 그런 감각을 소중히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예를 들어 어른들이 자녀 세대에 미안해하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사회가 이렇게 모순들을 많이 안고 있는 게 우리의 잘못이다,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벅찼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감동과 울림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자고 꿈을 키우게 됐지. 지금도 궁극적으로는 교육학자, 사회운동하는 사람 등 사회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시민36 :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려운데. 귀중한 경험을 했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일찍이 찾으면 좋을 텐데. 현재의 교육제도가 그런 역할을 못하고 있다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H : 경쟁제도와 주입식 모델 때문이라고 생각해. 결국 수능 때문에 줄 세우기를 하고. 누군가를 짓밟아야만 내가 설 수 있는 것들을 어릴때부터 경험하잖아. 영화 ‘다음 소희’ 봤어?  콜센터 고등학생 아이들이 실습을 나갔다가 성과 압박에 치여서 괴로워하는데, 문제를 외면하는 어른들 때문에 죽어가는 학생의 이야기거든. 이런 경쟁과 주입식 교육은 오래된 고질적인 문제지. 교육문제는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뿌리라고 생각해.  영화 ‘다음소희’의 한 장면. 실적과 성과급 순위를 벽에 걸어놓고 공개하여 실적 압박을 준다. ( 중앙일보 ‘그 영화 이 장면’ 2023.02.01) 시민36 : 그럼 교육제도가 어떻게 개선되면 좋을까? H : 주입식 교육제도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상상이 필요해. 주입식 교육이 창의로운 사고를 가로막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큰 문제는 순종적인 자아를 만들어낸다는 거야. 고정된 틀 안에 계속 밀어 넣잖아. 그렇다 보니 사회비판을 잘 하지 못하고 권력에 쉽게 순종하는 모습이 되는데 결국 이게 여러 사회문제를 방치하는 현재의 모습을 만든 거 같아. 추가적으로 성교육에 대한 부분도 우리나라에서는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있어.  시민36 : 그렇다면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H :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비판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주입식 교육이 결국에는 어떤 걸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거잖아. a가 a라고 하면 a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주입식이지. 이건 독일식으로 비유하면 전체주의를 만들기 위한 기초가 되었던 나치즘의 전형이기도 해. 비판 교육은 a가 왜 a인지 생각하도록 훈련을 하는 거야. 독일에서는 ‘올바른 해석이 존재하는가’ 부터 사유하는 해석학의 대전제를 배워.  중등교육에서부터 올바른 해석이 가능한지 비판해볼 수 있는 자아가 생기는 거지. 주입식 교육을 비판교육으로 전환해야한다고 생각해.  시민36 : 중학생 때부터 ‘올바른 해석이란 존재하는가’ 사유한다라. 우리는 고등학교 때 ‘윤리와 사상’이라는 철학사만 배웠는데. 그것도 선택과목으로.   H : 그래서 독일에서 제일 부러운 것은 시위하는 초등학생들이 있다는거야. 한국은 성인도 시위 같은 어떤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일을 잘 안 하잖아. 촛불 민주주의와 같은 군중적 행위는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하기 어려워하지. 독일은 초등학생들이 관저앞에서 ‘우리의 교육시간이 너무 길다 줄여달라’ 등의 피켓시위를 해. 그러면 메르켈 총리가 담화 때 그런 시위 주제를 언급하기도 하고 그래. 우리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개인들인데. 주입식이라는 우산이 가로막고 있지 않나 싶어. 독일의 의무교육 시간이 늘어나자 교사들이 수학여행 등을 취소하기로 함. 이에 초등학생들이 교육시간이 늘어나는 결정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였다. (EBS 2015.03.03) 교육제도 문제로 시작된 H와의 이야기는 그 후에 시험능력주의, ‘공정’ 담론까지 이어졌습니다. 종종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합니다. 물론 교육 제도 개선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될 순 없지요. 그러나 교육의 역할이자 핵심은 H의 말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사유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교육제도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발생되는 치명적인 경쟁주의 문화는 많은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교육제도의 문제와 개선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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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청년들에게 이름을 지어줄까: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을 보며
일본 경제를 이야기할 때 “잃어버린 20년(失われた20年)”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원래는 1980년대의 멕시코 경제를 이야기할 때 처음 사용했던 용어지만, 지금은 일본 경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면 그 누구도 멕시코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더 나아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우리에겐 가수 설운도가 불렀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로 시작하는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주제곡 제목으로 유명한 그 말이 지금 일본 경제에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잃어버린 40년”을 향해 갈 것이냐 아니냐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버블 경제 붕괴의 원인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기 청년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억총중류(一億総中流, 이치오쿠소-츄-류-) 1970년, 일본 인구는 1억을 돌파했고, 한국의 정계나 방송계에서 “사천만 국민”, “오천만 국민”이라는 말을 하듯이 이 시기부터 일본의 각종 방송에서는 “일억 일본인”, “일억 이천 만 일본인”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인기 가수 고 히로미(郷ひろみ)가 발표한 <2억 4천 만의 눈동자(2億4千万の瞳)>라는 노래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 경제가 발전하고 어마어마한 호황을 누리면서 일본 국민 대다수가 계급적으로 중류층 정도의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등장했다. 이것이 바로 “일억총중류(一億総中流)”다. “일억총중류”라는 말에는 일본 국민들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적고, 대다수의 국민이 높은 수준의 소비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들어있다. 실제로 이 시기 일본의 지역간 경제 격차가 그 전에 비해 축소되는 경향은 있지만, 이런 말이 유행하고, 이런 말이 강박적으로 사용되면서 일본 사회에선 ‘일본 국민 사이에는 경제적 격차가 없거나 적고 극소수의 부유층과 빈곤층을 제외하면 모두가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일종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버블경제의 붕괴는 경제의 불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신화가 허구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비정규직의 증가 일본 사회에서는 버블이 꺼진 1990년대 이후 20대 청년들의 고용이 불안정해졌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N년 동안을 취직빙하기(就職氷河期, 슈-쇼쿠 효-가키)라 부르기도 한다. 고용 시장이 얼어붙었다는 것이다.  청년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대체한 것은 고용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비정규직의 증가였다. 일본에는 정규직이라는 말은 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고 아르바이트, 계약직 사원, 파견 근무 등으로 쪼개져 있다. 일본 총무성에서 조사한 <고용형태별 고용자수> 통계를 보면 1988년 2월 전체 고용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18.2%였지만, 그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나 1990년에는 20.2%, 2000년에는 26.0%, 2003년에는 30.4%를 기록했고, 2019년에는 38.2%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 이후에는 다소 줄어 2020년에는 37.1%, 2021년에는 36.7%, 2022년에는 36.9%를 기록했다. 경기 불황 속에서 일본 정부는 기업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고용 유연화에 관한 법을 제정하며 정규직 축소를 부추겼다. 청년 세대의 빈곤과 절망, 격차 문제,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었다. 또, 여기엔 젠더 문제도 빠질 수 없다. 1990년 2월, 남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8.8%이지만 여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38.1%였다. 2000년의 경우, 남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11.7%지만 여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46.4%다. 비정규직 비율이 최고치를 찍었던 2019년의 경우 남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22.8%지만 여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56.0%였다. 2022년의 경우 남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22.2%지만, 여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53.4%였다. (이상 労働政策研究・研修機構)  격차(格差, 카쿠사)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주 언급되기 시작한 단어는 바로 격차(格差)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양극화’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데, 특히 2006년에는 한 해 동안 유행했던 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랭킹을 매기는 신어/유행어 대상(新語・流行語大賞)에서 탑10 안에 들어가기도 했다. 사실 일억총중류라는 말이 유행하던 일본 경제의 호황기에도 격차 문제를 지적하는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는 존재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격차라는 말이 수면 위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버블경제 붕괴의 시작점이라고 지적하는 바로 그 시점이다. 1988년 정부가 발표한 『국민생활백서(国民生活白書)』에 (아주 오랜만에) 격차라는 말이 등장했고, 그해 11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사설 제목으로 「격차사회여도 괜찮은가(『格差社会』でいいのか)」라는 말을 제시한 것이 격차라는 용어가 일본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상징하는 말로 등장한 첫 사례라고 알려져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승리자 그룹(勝ち組, 카치구미)과 패배자 그룹(負け組)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2004년에는 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弘, 1957~)가 『희망격차사회(希望格差社会)』라는 책을 쓰면서 일본에서 “격차”라는 이름을 단 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야마다는 “패배자 그룹의 절망감이 일본을 찢어발긴다(負け組の絶望感が日本を引き裂く)”라는 자극적인 부제목을 단 이 책에서 더 이상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라는 것을 느낀 패배자 그룹이 늘어나면서 직업, 교육, 나아가 가족 구성까지 불안정해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일본 사회는 이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계급과 절망만을 가지는 계급으로 나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의 저서 『희망격차사회(希望格差社会)』.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한 그룹과 대학에 진학한 그룹의 삶의 격차를 직업, 교육, 가정의 측면에서 비교 분석한 책이다. 이 책 이후 '~~격차'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야마다가 이 책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학력의 차이(대학에 진학했는가 아닌가)가 이후의 인생 전반을 결정짓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사례 제시를 통해 보여주면서 희망에도 격차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언뜻 들으면 꽤 수긍이 가는 내용이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다. 이런 격차가 과거엔 없었는가? 야마다가 어떤 의도에서 이 책을 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경제의 불황으로 인한 청년 세대의 괴로움을 고발하는 이야기들은 이후 가난과 격차 문제를 청년 세대만의 문제로 가져가는 식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학교 폭력 문제가 대두되고 암기 중심 교육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경험과 사고력을 중시하는 교육이 대두되었다. 이런 교육을 유토리교육(ゆとり教育)이라 하고, 이런 교육을 받은 세대인 80년대생 이후 출생자를 유토리 세대라고 한다. 일본 경제의 번영기를 제대로 맛보지 못한 세대들, 80년 후반에 중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었던 세대와 그 이후 세대를 유토리 세대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도 1987년생 이후 출생자를 사토리세대(さとり世代)라고 한다. 사토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딱히 물욕도 없고 연애에도 관심이 없는 모습이 마치 깨달은 사람들 같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의 학습량이 다시 증가하면서 탈-유토리세대(脱ゆとり世帯)라는 말도 등장했다. 버블 붕괴 이후의 일본 사회는 계속해서 청년 세대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  사회적/역사적 경험이 다르다면 세대에 따른 특징이 없기도 힘들 것이다. 세대론이 얼마나 유효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반적인 사회경험이나 사회적 경향성을 특정 세대에게 부여하고 이름을 지으며 교묘히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일본 사회의 청년 네이밍을 보며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88만원 세대 이후 한국의 청년 담론에 대해서도 복잡한 마음이 든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도 잘 모르겠다. 괴로운 것도 청년, 고쳐야 하는 것도 청년? 일본의 경우에는 노동조합의 역사가 길고, 오랜 기간 경제 호황이 이어진 덕(?)에 노동조합이 실제 기득권화 된 부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일본 청년들 중에는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용유연화를 추진한 기업과 정부에 분노하는 사람도 있고, 노조와 부모 세대를 기득권 집단으로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증오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각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세대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속박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소위 치유/힐링의 유행이 이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붐처럼 만들어졌던,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골 마을(산촌, 어촌)에서 편안한 차림의 젊은이들과 그들이 있는 풍경만 예쁘게 담는 일본영화들은 이런 유행에 편승한 작품들이다. (이런 영화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건 사실이니까...) 한국은 어떨까? 누군가는 청년 스스로 주거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 혹은 대안을 모색하고 시도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주식과 코인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며 일론 머스크를 찬양하고 자신을 계발해야 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청년들이 불쌍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렇게 아파야 청춘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청년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아서 이 모양이라고 말한다. 그 전에 청년은 또 뭘까? 어떤 사람은 청년은 허구라고 하는데, 또 한쪽에서는 뭐만 하면 MZ를 운운한다. 86이라 불리는 세대에 대학생만 있는 게 아니듯이, 청년도 가난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은 아주 옛날부터 가난했다. IMF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원래 가난했으니까! 지금은 월세집에 살고 있다. 나는 빚도 있다. 프리랜서 노동자인 나는, 직장에  다닐 때 얻었던 수입을 얻으려면 그때보다 더 많은 노동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딱히 결혼할 상대도 없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성소수자인 나는 애초에 결혼할 권리도 없다. 하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마트에 갈 걱정, 병원에 갈 걱정도 지방 사람에 비해 덜할 것이다. 여성들에 비해선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나는 안전 문제에 무감각한 편일 것이다. 대학 교육도 받았고 유학까지 갔다왔으니 누군가가 보기엔 내가 여유 있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처한 입장이야 다르겠지만 30대라는 나이 때문에, 9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고 200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사실, 나와 비슷한 정치적 경험을 하고 같은 방송을 보고 같은 음악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그렇게까지 몸서리 쳐가며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 감정은 뭘까. 단순한 추억의 집합일 뿐일까?  각자가 느끼는 감정은 다 다를 수 밖에 없지만, 어딘가에선 그 감정이 모여서 크게 혹은 작게 분출되기도 한다. 그 감정의 집합은 다양하다. 크고 작은 감정의 집합에서 분출하는 주장은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이다. 그 정치성과 윤리성(무엇을 문제시 하는가)을 세세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오로지 나이로만 띡 묶어버리는 이름 짓기-n포세대, 이대남, 90년대생이온다, MZ-는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실패한 분석이다. 세대론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대론이 없다고 하는 말에도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의 세대론은 실패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계와 지식계의 실패다. 
26조원, 역대 최대치 사교육비 총액과 교육격차
<교육 분야 양극화 추이 분석 연구> 에서는 교육 분야의 양극화를 ‘개인의 배경, 즉 가계소득, 부모학력, 문화적 배경 등에 의해 교육의 기회, 과정, 결과에서 상하집단으로 쏠리게 되면서 중간층이 감소하고 집단 간 이질성이 커지며 집단 내 동질성이 심화되는 가운데 집단 간 이동성이 약화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합니다. 통계청이 교육부와 공동으로 전국 초중고 약 3,000여 학급을대상으로 실시한 2022년 초중고사교육비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득은 사교육비 지출과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가구 소득수준의 경우, 월평균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사교육비 지출이 높았으며, 월평균 소득 800만 원 이상 가구 대비 300만 원 미만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의 지출 격차는 약 3.7배로 나타났습니다. 작년(2021) 조사에서도 800만 원 이상과 300만 원 미만의 가구소득 구간에서 사교육비 지출 격차가 약 3.7배로, 소득과 사교육비 지출의 상관관계는 유사한 규모로 지속하고 있습니다. 가계 소득이 사교육비 지출과 사교육 참여로 이어지며 교육 양극화가 심화하는 가운데 2022년 초·중·고교생의사교육비 총액이 역대 최대인 26조 원을 기록했습니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다양한 사교육 수요를 공교육으로 흡수할 수 있는 사교육 경감 대책 마련’의 시급함을 지적하였습니다. 교육부는 10년 만에 사교육대책팀을 부활시켜 상반기 안에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발표할 계획입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논평을 통해 교과 학습 보충 및 튜터링 지원, 방과후학교 및 돌봄 확대 등의 근시안적 대책으로는 사교육비 증가의 근본 원인을 해소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기초학력 보장을 위한 협력 교사 배치, 과밀학급 해소를 위한 공간 확보와 정규 교원 확충이 필수적이며, 입시경쟁교육 해소와 대학 체제 개편 방안 등이 동시에 제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는 대입과 고입 경쟁을 먼저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과도한 대입경쟁 현실 개선과 고교서열 세분화 정책 철회, 고교서열화 해소 방안 유지, 영재교육 정상화 실시 등이 요구됩니다. 또한, 사교육 기관의 과도한 선행교육 상품 및 불법적인 신종 사교육 상품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교육 양극화에는 사교육 비용뿐만 아니라 부모 학력, 문화 자본 등 여러 문제가 맞물려 있습니다. 최근 <부모의 배경이 학력격차에 미치는 영향과 해소방안>을 주제로 한 국회 정책토론회에서 여러 정책과 사업이 관련된 종합대책으로서 부모 경제력에 따른 학력격차 대책이 강조된된 것과 궤를 같이합니다. 사교육 대책일 뿐만 아니라 교육 양극화 자체의 대책이 될 수 있는 교육, 경제, 디지털 변화, 민주주의 등 다양한 방면의 의견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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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 등 A.I.는 교육 평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사진: Unsplash의Andy Kelly 2016년 알파고가 바둑계에 던진 충격 이상으로 오픈AI의 챗GPT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정부는 오는 2025년 수학, 영어, 코딩 교육에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 맞춤형 교육을 교육개혁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AI를 통한 맞춤교육이란 무엇이고, 이것은 교육 평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AI 맞춤형 교육이란? 『챗GPT 교육혁명』(정제영 외, 포르체, 2023)에 따르면 이제껏 교육은 한 선생님이 수준이나 흥미가 다른 여러 아이들을 동시에 가르침으로써 교육 평균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AI는 개별 학생의 흥미와 수준에 맞추어 개별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AI 맞춤형 교육은 과연 교육 평등을 실현할 수 있을까? 1. 지역간 교육 불균형과 AI 맞춤 교육 AI를 통한 교육은 일견 지역 간 교육 불균형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입니다. 사교육을 대체하여 AI가 개별 아이에 맞추어 진도를 나갈 수 있고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흥미에 맞춤형이라면 입학시험 외의 지표로 대학을 결정하는 것 외에도 AI를 통한 개별적 능력 지표도 다양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2.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와 지식 불균형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리터러시의 문제가 있습니다. AI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오히려 AI가 지식의 차를 극대화하고, 각 학생들이 전혀 다른 교육과정을 밟아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좋을 수도 있지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전혀 다른 세계 속에 살게 되어 극단적 지식 불균형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배움 능력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그에 맞춤식이 된다면 오히려 ‘학년’ 이나 ‘반’ 등이 무의미해지고 개별화 파편화 될 수 있습니다. AI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AI의 ‘환영’(hallucination)과 ‘탈옥’(jailbreak), ‘편향’(bias)의 문제 현대 대두되는 챗GPT의 문제점은 ‘환영’과 ‘탈옥’, ‘편향’의 문제입니다. ‘환영’은 인공지능이 그럴듯한 대답을 하기 위해 현실과 다른 정보를 생성하거나 관련 없는 결과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인터넷뉴스가 발달하고 개인 뉴스 플랫폼이 이루어지면서 가짜 뉴스(Fake News) 문제가 기승을 부리 듯, 챗GPT 역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답을 내놓는 문제점이 있고, 이것을 걸러내는 것이 또 하나의 정보 불균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탈옥’은 인공지능이 개발자의 의도를 벗어나, 윤리와 안전을 이유로 제한한 영역을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정보 유출이라든지, 불법적 방법을 내놓는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교육 평등을 넘어서 AI 교육에서 어떻게 윤리성을 담보할 것인가하는 문제와 연관됩니다. ‘편향’이란 AI 교육이 평등이 아닌 오히려 불평등한 내용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I는 인간이 만든 지능이므로, 챗봇 역시 개발자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편중된 시야의 교육이 나올 수 있습니다. AI교육이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4. AI가 가르칠 수 없는 것 지역 간 교육격차는 단순히 일타강사를 못 만난다거나 질 좋은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데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역 발전 불균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일례로 근처의 종합운동장에 가려고 해도, 종합운동장 자체가 없는 지역도 있습니다. 미술관이나 연주회도 디지털로 체험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학교에서는 단지 지식 뿐 아니라 인성과 또래 집단 간의 우정, 인간에 대한 배려 등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AI가 가르칠 수 없는 것이고, 인간과 인간이 같이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5. AI 교육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은 무엇일까요? AI 교육이 많은 장점과 우려할만한 점이 있더라도, 세상은 이미 AI 세계에 흡수되어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AI교육의 문제점을 파악하기도 전에 기술력이 윤리적 평가를 앞서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AI교육이 미래 세대 혹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거라 생각하십니까. 현재 바둑에서는 AI 치팅 문제를 비롯해 이제는 프로 바둑기사들이 AI 방식을 따라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AI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보다 인간을 보다 더 기계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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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페이와 현금 없는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요?
국내에 애플페이가 상륙하여 출시 첫날부터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애플페이를 사용할 수 있는 현대카드 등록 건수만 100만건을 돌파했고, SNS와 블로그에는 너도나도 애플페이 사용자 후기가 업로드되었습니다. 핸드폰에 앱만 등록하면 지갑 없이도 간단히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은 디지털 기기 사용에 익숙한 대부분의 소비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함을 제공했습니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3월 21일 애플페이 출시일을 “한국 페이먼트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날”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2023.03.28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애플페이 출시, 한국 페이먼트에 이정표", 출처 매거진 한경) 점점 대한민국도 ‘현금 없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식당 주문도 키오스크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습니다. 간편한 원스톱 주문으로 종업원을 호출하거나 대면할 필요도 없어 편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이 보편화될수록 디지털 변화에 취약한 고령층이나 시각장애인 등 정보격차에 소외받는 이들이 생기게 됩니다. 실제로 서울시에서는 2023년 3월 1일부터 현금없는 버스를 확대 운영하고 있는데 현금결제 승객 대체수단으로는 (1) 교통카드 구입(근처 편의점), (2) 모바일 교통카드 이용, (3) 배부받은 납부안내서로 계좌이체 3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2023. 4.3 "카드없인 못 타"…'현금없는 버스'에 노인들 막막, 출처 JTBC 뉴스). 그러나 실제로 버스를 탔을 때 카드가 없거나 잔액이 부족한 경우, 앱을 설치하여 현금을 충전하고 납부하는 형식이나 계좌이체를 하고 기사에게 확인시키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해서 일반시민은 물론 외국인, 휴대폰이 없는 아이들이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물며 버스를 사용하는 사용층 중 현금 이용률이 높고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은 일방적으로 바뀐 시스템에 더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을 위한 사전 교육과 안내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보다 먼저 대중교통을 비롯 현금 없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어떨까요?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이러한 부작용을 먼저 겪으면서 ‘현금사용 선택권 보장(소비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결제 수단 선택 시 현금을 배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취약대층을 위한 대응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지급결제서비스법을 통해 예금규모가 700억크로나 이상인 상업은행에 입출금 서비스 의무를 부과하고 있으며, 영국은 영란은행 홈페이지에 ‘wholesale cash distribution in the future’ 세션을 통해 현금없는 사회 진전에 따른 대응 및 논의 내용을 게시하고 있습니다. (현금사용선택권이란?, 출처 한국은행 홍보교육자료) 디지털 없는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배려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할 때 진보하는 기술만큼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될 사람들의 삶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변화하는 시스템의 속도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디지털 취약계층을 위한 교육 및 홍보의 부재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는 디지털배움터를 운영하고 있고, 기업과 금융권에서도 ESG 경영에 발맞춰 디지털 취약계층을 위한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도 닿지 않는 디지털 사각지대가 많습니다. 갈수록 심화될 디지털 소외 문제, 여러분은 어떻게 대비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디지털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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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있지만 없는, 학교 내 인권 이야기
들썩들썩떠들썩 ④ '있지만 없는, 학교 내 인권 이야기' ‘학생인권조례’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교내 학생인권 문제는 지역사회에서 오랫동안 주요하게 다루어져왔습니다. 학생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생인권 조례는 2010년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시작으로 현재 경기,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제주 6개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는데요.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학생의 인권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학생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교사인권과 상충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 학생인권조례를 넘어 학교라는 공동체 안 구성원들의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학교 내 인권에 대해 어떤 목소리가 필요한지 함께 논의하는 공론의 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아래 링크로 참가신청 해주세요!bit.ly/parti_sc ? 이렇게 진행됩니다. ✅ 일시 : 2023년 04월 22일(토요일) 14:30~16:30✅ 장소 : 서울시공익활동공간 삼각지 지하1층 모이다, 다목적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1가 백범로99길 40)✅ 대상 :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더 알고 싶은 시민 누구나(선착순 30명) 1부 : 발제 | 14:30 ~ 15:10발제1. “왜 여전히 학교에서 인권을 지키는 것이 힘들까”-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채움활동가 백호영발제2. “학생인권VS교권이라는 담론을 넘어”- 서울지역 고교 교사/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전국시민행동 활동가 조영선 2부 : 토론 | 15:10 ~ 16:30소그룹 토론전체나눔과 회고 ? 이런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더 알고 싶은 시민 누구나- 학교 내 인권에 대한 고민, 대안을 함께 나누고 하고 싶은 분-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협력해 만들어가는 세상에 관심 있는 분 ? 미리 보고 오시면 당일 토론에 도움이 되실 거에요! ? 짧은 영상으로 주제 이해하기 (링크)? 캠페인즈 사전토론 (링크) ✅ 별도 온라인 송출은 진행하지 않습니다.✅ 문의 : contact@parti.coop | 주최: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 후원: Open Society Foundation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못하는 <2022 개정 교육과정>
<2022 개정 교육과정>은 2024년 초등학교부터 적용하기 시작해 2025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적용합니다. 2022년 12월 확정 발표가 있기까지, 그리고 발표 후에도 성평등, 성소수자 등의 용어를 삭제하고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동교육을 둘러싼 상황도 유사합니다. 이번 교육과정 개편 중 노동교육 관련 내용을 알기 위해선 2021년 11월 교육부가 발표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 사항 시안’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총론 시안은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주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안에서 제시한 과제의 꼭지 중에는 ‘미래 변화에 대응하는 교육과정 혁신’이 있고, 미래사회를 대비하는 교육 방향 제시의 개선안으로 ‘일과 노동에 포함된 의미와 가치’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총론 교육 목표 최초로 ‘노동’을 직접 언급하여 노동교육이 우리 사회의 교육적 목표가 되었음을 시사하였습니다. 2021년 1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제76회 총회에서 ‘노동교육 관련 요소, 2022 개정 교육과정 반영 요구’를 의결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9개월 후, 2022년 8월 발표한 총론 시안에는 ‘일과 노동에 포함된 의미와 가치’의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167개 노동·시민단체가 연합한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는 노동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교육과정에 다시 명시하기를 촉구했습니다. 10월에 열린 개정 교육과정 총론 시안 공청회에서는 최서현 전국특성화고노조위원장이 "교육과정 총론 시안에 노동을 삭제한 윤석열 정부를 규탄한다"라고 발언하자 한 남성이 최위원장을 밀치고 마이크를 뺏으려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했습니다.  2022년 11월에는 시안 단계를 지나 개정안이 행정예고 되었습니다. 행정 예고된 <초·중등학교 및 특수교육 교육과정>에서는 ‘노동자’를 ‘근로자’로 변경하였습니다. 관련하여 국가인권위원장 성명은 ‘근로자’는 헌법과 법률상의 용어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노동자’라는 용어 또한 보편적으로 사용해온 점을 고려하여, 어떤 용어를 사용할지에 대해 연구진 등 교육계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지난 12월 확정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은 2021년 주요 안과 비교하였을 때 ‘노동의 가치’가 ‘일의 가치’로, ‘노동자’는 ‘근로자’로 바뀌며 마무리되었습니다. 교육과정 최초로 반영된 ‘노동’이라는 용어를 일 또는 근로로 대체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비단 노동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퇴보되었다고 평가받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이 2024년에 실제로 현장에서 적용되기 전까지, 우리 사회는 어떤 논의를 이어가야 할까요?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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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과 정유라 SNS 받아쓰는 언론 보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특정 산업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저는 그 중 하나가 직업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산업 종사자들에게 직업 윤리가 없다면 잠시 호황기를 맞더라도 오래 갈 수 없고, 침체기에 들어선 후엔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한국 사회 최고 불신 대상인 ‘언론’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한국 언론의 언론 윤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글 싣는 순서 조민과 정유라 SNS 받아쓰는 언론 보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자님, 기사 속 그 코멘트는 정말 전문가 의견인가요? ‘기레기’에서 시작된 기자 비하 문화로 언론 보도가 좋아질까요? 가이드라인 만들고 안 지키는 기자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국 언론에는 시민 참여가 충분히 이뤄지고 있을까요? ‘“양갈래 머리 잘 어울리네”…‘말괄량이 삐삐’ 변신 조민 패션 ‘화제’’ 이런 기사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딸 조민 씨의 SNS를 꽤나 자주 마주쳤는데요. 사실 저는 조민 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울분 토한 정유라, 조민 공개 저격…“북 콘서트나 쫓아다니는 누가 더 부러워”’ 이런 기사를 접하다보면 조민 씨의 일상을 넘어서 국정농단의 중심인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 씨의 반응까지 알게 됩니다. 언론 윤리 이야기를 시작하며 여러분과 처음으로 나누고 싶은 소재는 ‘SNS, 커뮤니티 받아쓰는 언론 보도’입니다.   SNS, 커뮤니티로 출근하는 기자들 SNS를 옮기는 기사가 최근에 등장한 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2019년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자녀 관련 의혹 보도에서 인용된 진중권 광운대 교수의 SNS가 있는데요. 당시 진 교수가 조 전 장관의 임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SNS에 게시하면 언론이 이를 옮기는 보도 양상이 보였습니다. 이후에도 유명인 SNS는 기자들의 단골 맛집(?)이었는데요. KBS '질문하는 기자들Q'가 2021년 11월 한 달 동안 유명인 페이스북 받아쓰기 기사를 분석해보니 “모두 6,020건”, “하루 평균 200건”의 받아쓰기 기사가 나왔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기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야겠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보도가 유명인의 SNS를 옮기는 방식으로 쓰였다는 증거입니다. 기자들의 단골 맛집에는 커뮤니티도 있는데요. 미디어오늘 ‘‘커뮤니티 받아쓰기’ 언론, 이대로 괜찮은가‘의 분석을 보면 “기사 80%가 ‘커뮤니티 받아쓰기’인 기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일부 언론사는 ‘온라인팀’으로 불리던 조직이 별도의 계열사로 분리되어 커뮤니티 받아쓰기 기사 양산 체제를 갖췄고요. 이런 현상은 저널리즘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끝없는 가벼움’…SNS, 커뮤니티발 기사가 만든 문제들 SNS, 커뮤니티를 출처로 한 기사가 유발한 문제를 먼저 정리해보려 하는데요. 문제 사례를 같이 보시죠. 2021년 7월 뉴스1 ‘핫팬츠 女승객 쓰러졌는데 남성들 외면…3호선서 생긴 일 '시끌'’은 ‘지하철 내에서 여성 승객이 쓰러졌음에도 남성 승객들이 성추행 누명을 우려해 돕지 않았다’는 커뮤니티 게시글을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기사가 발행된 후 사회 갈등 사안으로까지 논란이 커졌는데요. 이 기사 사실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뉴스1 보도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해당 사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한 연합뉴스 ‘[팩트체크] '3호선서 쓰러진 여성, 남성들이 외면' 보도는 가짜’를 보면 사건 접수 및 대응 주체인 서울교통공사가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한 대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사건 당시에는 “신고를 받고 대기하던 역무원이 쓰러진 여성을 승강장으로 옮겨 구호 조치를 했”고, “자신을 의사라고 알린 남성이 여성을 도왔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쓰러진 여성을 돕는 분위기였다”는 현장 역무원들의 반응이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한 커뮤니티에 해당 사건을 119에 최초로 신고했다고 주장하는 누리꾼이 등장해 보도를 반박하기도 했는데요. 독자를 비롯해 시민사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언론인권센터는 논평 ‘취재 없는 기사가 맥락 없는 혐오와 갈들을 부추긴다’에서 해당 보도를 아래와 같이 지적했습니다. 지난 5일, 보배드림 커뮤니티 게시글이 뉴스1을 통해 기사화됐다. (중략) 뉴스1은 해당 게시글에 <핫팬츠 女승객 쓰러졌는데 남성들 외면...3호선서 생긴 일 ‘시끌’>이라는 제목을 붙여 기사화했다. 이후 많은 언론사에서 해당 기사를 받아쓰면서 온라인 상의 젠더 갈등에 불을 붙였다.(중략)이번 사건은 서울교통공사나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특히 최근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갈등이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젠더 이슈는 매우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언론사들은 갈등을 증폭시킬 게 뻔한 사건을 사실 확인도 없이 보도했다. SNS, 커뮤니티발 기사 왜 끊임없이 나올까? 사례를 확인했으니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앞서 확인한 문제 사례는 저널리즘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크게는 ‘황색 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선정적인 가십성 보도의 양산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언론에 대한 반감이 증가하고, 자연스레 불신도 커졌을 겁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좋은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일이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SNS, 커뮤니티발 기사가 끊이지 않는 걸까요? 문제의 원인을 찾고 싶다면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을 확인해야겠죠. 한국 언론 문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가 ‘조회수 경쟁’인데요. 2022년 기자협회보와 한겨레신문 미디어전략실은 포털 뉴스 페이지뷰를 확인하는 협업을 진행했습니다. 2021년 말 기준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모바일제휴를 맺은 매체 73개의 기사 일간 페이지뷰를 조사해 분석한 건데요. 내용을 정리한 기사 ‘네이버에서 가장 많이 읽힌 뉴스, 대부분 '저질·연성화' 뉴스’를 보면 대부분이 질이 낮은 기사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보다 자세한 분석 결과는 페이지뷰 상위 1~20위 기사를 정리한 결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질 낮은 기사들 사이에 SNS, 커뮤니티발 기사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읽힌 기사 5위 조선일보 ‘‘전신 피멍’ 아옳이, 대학병원 검사 결과는 ‘반전’’는 유튜버가 올린 영상을 그대로 전달한 기사입니다. 이어 8위 한국경제 ‘"레깅스만 입고 자주 외출하는 딸이 걱정돼요"’는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확인조차 불가능한 출처에 올라온 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페이지뷰 상위권에 오른 다수의 보도가 SNS, 커뮤니티발 보도였습니다. 이유가 조금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좋은 저널리즘과 거리가 멀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그대로 전달해 오보의 위험이 있음에도 조회수가 높게 나온다는 겁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언급한 조민, 정유라씨의 SNS가 끊임없이 기사로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민, 정유라의 SNS를 옮기는 것이 ‘다수가 클릭하는 기사’로 쓸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활용되고 있는 겁니다.   언론 윤리 훼손하는 SNS, 커뮤니티발 보도 시민이 막을 순 없을까 결론을 정리해보죠. SNS, 커뮤니티발 보도는 한국 언론의 현실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를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와 언론사가 등장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혐오와 갈등 조장, 언론 불신 확산과 같은 저널리즘 훼손이었습니다. 당연히 ‘취재를 통해 기사를 작성한다’는 언론의 기본을 지키지 않는 일이기도 하죠. 종합해보면 ‘클릭수’라는 이유로 언론인들이 스스로 직업 윤리를 외면한 결과였습니다.  한국기자협회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인 단체들은 오래 전부터 저널리즘이 실종된 한국 언론 현실에 대해 ‘반성한다’, ‘개선하겠다’고 이야기 해왔습니다. 하지만 언론인들의 다짐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연성화된 보도가 쏟아졌고, 자정작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론인들이 주도적으로 언론 윤리를 바로 세우는 일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SNS, 커뮤니티발 기사 문제도 언론인들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저널리즘의 구현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뉴스 소비자인 시민의 주도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청사진을 당장 ‘짠!’하고 내놓을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사소한 변화부터 만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여러분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언론 윤리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선정적 기사 클릭 안 하기’를 제안해봅니다. 앞서 확인한 것처럼 질이 낮은 기사가 양산되는 원인에는 ‘클릭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의 해결책은 그들의 목적이자 생존수단인 클릭수를 주지 않는 것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클릭하는 기사의 성향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특정인의 감정적 발언이 그대로 들어간 제목, 클릭을 유도하는 선정적인 제목, 유명인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부각하는 제목 등이 포함된 기사의 클릭을 멈추는 겁니다.  물론 제 제안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댓글을 통해서 같이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유명인의 SNS, 커뮤니티 게시글을 그대로 전달하는 보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언론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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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의 조속한 건립을 기원하며
기약 없는 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 또 사라진 '국가의 의무' - 뉴스 ... “합동분향소 운영 뒤 이전”…“추모공간 논의 시작” / KBS ... 이태원 추모 쪽지 훼손한 상인 기소유예...유족에게 사과 / YTN 조만간 416세월호 참사 9주기가 돌아옵니다. 23년 4월 4일,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추모 공간을 검색하면 가장 처음 나오는 뉴스의 헤드라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3년 지금 순간의 '검색 결과'를 기억해두고 시간이 흘러 또 어떻게 변화했는지 지켜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제가 기대했던 기사는 416 생명안전공원과 같이 416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시설 건립에 희망적인 메세지이길 바랬는데 아직은 요원한 모양입니다. 기억의 매개체를 만드는 일에 또 다시 이분법적인 정치적 갈등이나 편파적 주장만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속히 추모공간 건립 계획을 세우고 절차가 이행되기를 응원합니다.  우리는 가슴 아픈 참사의 기억을 저장하고, 기록된 매개체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모공간을 조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참사로 인해 상처 입은 공동체가 회복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후대의 사고를 예방하겠다는 다짐과 안전의 보장이기도 합니다.  그 공간에는 희생자와 유족과 남겨진 사람, 시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특정 일에만 찾아가는, 또는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 아닌 일상을 함께 하는 접근성 높은 공간이어야 하겠습니다.  그 공간은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인근지역 상인, 시민, 일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공공선의 마음으로 참여해서 가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쓰다 보니 추모공간 건립의 방향성처럼 적었는데 결국 정부나 서울시 주도의 추모공간 구성과 위로보다는 시민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지속되어 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시나, 정부, 정치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추모공간은 필요하고, 또 심각하게 비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잊혀지지 않기를 강조하는 비장함보다는 스스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단단한 기억으로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태원 참사 추모와 애도 이후, 차츰 희미해져가는 의미를 붙잡고 지금 어떠한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면, 추모공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고 어때야 할까, 그 형식은 어땠으면 좋을까를 함께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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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를 만들고, ‘디자인’을 개편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캠페인즈팀입니다.항상 캠페인즈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캠페인즈가 캠페이너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캠페인을 벌이는 ‘디지털 시민 광장’이 될 수 있도록 홈을 개편하고, 디자인을 개선했습니다. ‘투데이’에서 지금 떠오르는 사회 이슈를 확인하세요. 더 많은 시민들이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 할 수 있도록 ‘투데이’를 만들었습니다. 시의성 있고 중요한 사회 이슈에 관한 캠페인·투표·토론이 메인 슬라이드와 메인 섹션에서 보여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요 이슈별 콘텐츠를 한 눈에 모아볼 수 있도록 ‘주목할 이슈'를 마련했습니다. 개편된 홈의 운영을 통해 시민들의 다양한 활동을 알립니다. 홈 개편은 캠페인즈의 ‘미디어'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회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궁금하다면, 투데이에서 지금 떠오르는 사회 이슈를 확인해보세요. 캠페인에 참여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투표하고, 댓글로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함께 ‘디지털 시민 광장’을 만들어 가요! ‘둘러보기’는 캠페이너의 다양한 활동이 모여있는 공간입니다. ‘둘러보기’에서 사회 이슈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캠페이너의 활동들을 모아 볼 수 있습니다. 캠페인·투표·토론·뉴스·데이터·소식을 기능·이슈별로 모아보고 원하는 활동에 함께 참여합니다. 만약 함께 논의하고 싶은 콘텐츠가 없다면 직접 캠페인·투표·토론을 만들어보세요! 그 외에도 ‘오리지널’은 공론장에서의 논의 과정과 결과, 워킹그룹 활동의 과정과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피드’에서는 구독하고 있는 캠페이너의 활동을 한 눈에 확인합니다. 피드는 올해 새롭게 더 개선 할 예정이니, 그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디자인 개편을 통해 ‘더 쉬운 캠페인즈’가 되었습니다. 더 쉽고, 간편하게 활동하도록 캠페인즈의 디자인을 개편했습니다. 특히 모바일에서 쉽게 이용하도록 화면의 형태를 다듬고 아이콘, 글씨 크기를 최적화했습니다. 시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디지털 시민 광장으로의 준비를 마친 셈입니다. 디자인은 4월 중에도 조금씩 더 개선될 예정인데요, 이전과 달라진 캠페인즈의 모습을 구경해보세요! 그리고 캠페이너로써 활동에 참여해 ‘디지털 시민 광장’을 함께 만들어가요? 디지털 기술은 발전하고 있지만, 시민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안전한 디지털 공론장은 부족합니다. 캠페인즈는 시민들과 함께 ‘디지털 시민 광장’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열심히 활동하는 캠페이너들을 응원 할 수 있는 기능을 개발 할 예정입니다. 캠페인즈가 다양한 활동을 확산하고 지지와 응원을 늘릴 수 있는 ‘내 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서로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시민 활동 생태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시고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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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정당으로 인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좌절 이후 진보정치의 과제
선거제도 개혁은 끝없이 소환해야 할 문제의식인 것 같습니다. 최근 "국회의원 정원, 늘려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논의가 이루어지고, 4월 1일, '[해보자! 시민대토론] “국회의원 수, 늘려? 말어?” – 국회의원 적정 정수 논의를 위한 시민 패널 토론 '공론장 행사가 열리는 것을 보니, 다시 '비례대표제'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2024정치개혁공동행동'이 2월 22일에 진행한 '“선거제 개편,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야하나?” 선거법 발의안 분석 및 평가 토론회'에서도 이야기가 되었네요. (아래의 글은 2020년 총선 이후 작성했던 메모입니다.) # 연동형비례대표제의 도입은 보수양당정치체제로 인해 배제되고 몫 없는 사람들의 실질적 대의가 어려운 조건을 타개하기 위한 제도 변형의 시도였다.  #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에 의한 민주적인 다당제로 진전하고자 하는 힘은 미래통합당(현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 창당에 의한 양당정치체제의 회귀의 힘으로 인해 2020 총선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 비례위성정당에 대한 인정은 ‘우리 편이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진영론 정치’와 맞닿아 있다. # 비례위성정당의 성공은 양당정치체제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깊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은 것이다.  # 제도정치현실주의에 입각한 선거실리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고, 이는 비례위성정당의 성립에 기여하는 동시에 소수진보정당에 여러 의미로 유해한 것이 되었다. 제도정치현실주의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인식 속에서 민주주의 제도로서의 의회, 선거 등의 범주를 정치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사회운동이나 시민참여 등은 민주주의의 외부나 부차적인 것으로, 사회구조의 변형은 이상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선거실리주의는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이 정치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관점이다. 선거실리주의는 제도정치현실주의 극단적인 한 형태인 셈이다. # 선거실리주의에서는 선거 승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 한다. 내부적인 성찰은 없다. 승리와 패배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 민주주의의 훼손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연동형비례대표제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위성정당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통합당은 위성정당을 추진함으로써 반민주적인 선택을 했고, 이를 용인한 선관위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물론 꼼수에 대한 꼼수 대응을 한 민주당 역시 그 다음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물론 특정한 선거제도 자체가 민주주의를 항상 담보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논의의 초점은 한국의 시공간적 맥락에서 오랜 시간을 걸려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제도 변형의 정치적 실천이 선거실리주의적 진영론 정치로 인해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에 있다. # 몇몇 진보정당들의 비례위성정당에로의 참여 시도는 양당정치체제를 대체하는 제3의 대안적 가능성으로서의 독자적 정치세력이라는 자신들의 위치성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다. 당원들의 내부적 반발로 인한 내파, 혹은 동력 약화의 힘이 작동했을 것이다. 진보정당들의 위성정당에의 참여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당 차원에서의 제도정치현실주의적 압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당의 리더 및 후보들의 ‘선거실리주의’라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선거를 통한 국회의원의 당선 그 자체는 대의민주주의에의 실질적 참여를 전제로 한다면 불가피할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의 가치/정체성/방향과 대립되는 선거지상주의는 당의 근간을 흔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안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소수진보정당에게서 더욱 그러하다. 선거를 통한 당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선거 전략들은 당내의 민주적 절차를 적절하게 거쳐야만 필요불가결한 제도정치현실주의로 위치되어 힘을 얻거나, 당의 내홍을 최소화 할 수 있다. # 민주당은 양당정치체제의 보수-진보 이분법에서 자신을 진보로 위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양당과 구별되는 진보정당의 성장에 적대적이다. 진보정당이 민주진보연합의 하위 파트너일 때에만 (거짓) 자율성이 용인된다. 민주당은 제3의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싹들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지난 총선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정의당의 의원수 최소화, 다른 소수진보정당들의 존립 근거의 약화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시민사회, 몇몇 소수진보정당들의 참여 등의 외부적 조건에서 책임을 분산시키면서 선거실리주의적 경향의 실질적 발현으로서의 비례위성정당을 가능한 한 정당화시키면서 출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명분을 얻었다는 점에서 수혜자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양당정치체제로의 실질적 회귀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 연동형비례대표제가 도입 된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이 큰 수혜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거대 양당의 비례위성정당의 등장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례위성정당의 비참여 및 독자노선은 민주당 2중대가 아닌 제3의 대안정치세력으로서의 위치성을 확고히 하는 정당한 선택이었다. 다른 소수진보정당들이 안타깝게도 대체로 참여 노선을 지향했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선거실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승리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인해 가장 큰 수혜가 기대되는 상황에다가 제도 추진의 핵심주체였기 때문에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할 수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당이 앞으로 제3의 대안정치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민주진보연합 노선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면 실리도 명분도 얻지 못하고 이도저도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봤을 때 여전히 그런 갈팡질팡의 상황인 것 같다.   #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진동하는 층과, 진보정당들 사이에서 진동하는 진보정치 적극 지지층이라는 각기 다른 방향이 있을 것이다. 정의당의 경우에는 전자의 방향에서 민주진보연합노선을 주로 택했었다.(문재인 정부의 개혁 성공을 위해 정의당을 지지해달라는 발언이나 "민주 20 대 정의 30 비율로 전략적 정당투표 해달라"는 요청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상식’(으로 알려진 것)에 기반하여 무정형의 대중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대의민주주의적 대중정당론과 조응하는 제도정치현실주의에 입각한 선거실리주의 전략이다. 이러한 인식은 민주당과 정의당 사이에 있는 유권자들의 인식을 단일선상에 놓고 평면화 하여 단순하게 인식하는 실증주의적 관점이다. 양당정치체제에서의 선거실리주의가 현실정치의 거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된다면 이러한 부당한 도식화는 분명히 현실적으로 큰 힘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유일한 사실인 것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그 큰 힘은 사회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하는 자기충족적인 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진보연합으로 종속되지 않고, 양당정치체제 내에서의 선거실리주의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피억압 대중에게 광범하게 호소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를 창안해 내는 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중요한 일부이자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주의라고 평가하더라도 말이다. # 무정형의 유권자 혹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다수의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말이 된다. 다른 층위에서 적극 지지층 혹은 활동가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으로 인해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진동하는 활동가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위한 실천이 필요하다. 이는 대안적인 정치적 실천을 실제로 벌여나갈 수 있는 진보정치 정치인 및 활동가들의 임파워먼트를 의미한다.  # 양당정치체제를 넘어서는 제3의 대안정치세력으로서의 진보정당을 지향한다면, 메시지, 즉 비전과 대안,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 변화에 대한 담대한 제안들이 있어야 한다. 이는 기존의 프레임으로는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판을 새로 조직할 수 있는 ‘판갈이’, ‘무상의료! 무상급식’ 등이 상징적 사례들이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탄소중립'을 위한 ‘그린뉴딜’, LH,대장동 사례에서와 같은 개발 카르텔 문제의 해결, 젠더 문제의 해결 등을 위한 사회의 구조 및 제도 변형과 관련되어야 할 것이다.  # 독자노선은 ‘제도정치 차원에서 현실성이 없다’는 경험주의적 비판과 ‘현실노선은 변형해야 할 구조로의 종속 및 재생산 경향이 있다’는 구조주의적 비판 사이에서 ‘현실적인 독자노선’이 되어야 한다. 즉 양당정치체제와 구별되면서도 제도정치에서의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를 창안하고 현실화해야 한다. 이 힘든 길이 진보정치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진보정치의 관점에서 제도정치현실주의는 선거실리주의로 환원되어 이해해서는 안 되며, ‘제도정치를 경유하여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조 및 제도의 변형을 실질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정치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현실주의 노선의 정립’으로 이해해야 한다. 제도정치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관점은 중요하지만, 사회운동과 대중운동, 시민참여의 증대,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임파워하는 것,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인 제3의 정치성을 제도정치화 하는 등의 정치적 실천, 즉 현실적이지 않다고 외면받고 있지만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사회운동정치/시민정치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 양당정치와 구별되는 진보정치의 중요성은 그곳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거에서의 실질적 성과는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부로 위치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실리주의는 수단이 목적으로 전도 된 것이다.
선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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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니트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방향에 대한 소고
‘니트’는 “Not currently engaged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로, 의무 교육을 끝낸 뒤에도 진학도 취직도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니트 청년은 2020년 기준 37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고 니트가 늘어나는 것은, 경제 성장이 둔화되거나 경제 위기가 발생하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 차원의 양극화 또한 중요한 원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강의 기적 속에서 유일하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된 부국이라는 자화자찬 이면의 니트가 증가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분배 혹은 재분배’, 평등한 관계 형성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이에 더해 부동산의 소유에 의한 부의 양극화 또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분석을 하든 구조적인 문제의 급진적 변형은 ‘노사정 대타협’과 같은 큰 정치적 지형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의 차원을 넘어선다.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의 연결, 그리고 시민의 지지와 압력의 결합 등 복합적인 정치적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1)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과 모순되지 않는 관점에서 문제들을 완화하는 소극적인(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정책을 추진하거나, (2) 국가 전체 차원의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의 맹아를 보여 줄 수 적극적인/실험적인 정책들을 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실행하고자 하는 정책이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과 상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정책의 경우 단기적으로는 정책 대상에 도움이 되지만 구조적 차원의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서울시의 사례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사회적 경제 영역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정책들, 청년 일자리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경제 영역과 밀접하게 연관된 뉴딜 일자리 사업을 실행하는 등, 구조적 차원의 문제 해결을 위한 맹아를 보여주는 실험적인 정책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면이 있다. 꼭 이 사례가 아니더라도 후자와 같은 식의 정책들에 힘을 쏟는 것은 구체적인 실천들을 모아 총체적인 정치적 비전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는 주로 양적 차원에서의 평가들과 조응하며, 후자는 질적 차원에서의 평가들과 조응한다.   성장-대량소비와 관련되는 자본-노동의 모델들이 만약에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혁명이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한계에 봉착한 것이라면(4차산업혁명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이야기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성의 공동체 사회, 욕망이 아닌 필요에 입각한 생산 및 소비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추구하거나, 사회적 경제의 발전이라는 비전에 입각하여, 공공영역에서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일련의 청년 집단들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실험이 될 수 있다. 어떻게 해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성장-대량소비라는 기준으로서의 ‘질 좋은 일자리’의 창출보다는, 사회의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노동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관점에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확보하기 쉽지 않은 더 많은 부가 일자리를 만들까? 부는 이미 많다. 부가 선순환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끝없는 경제성장은 환경을 파괴하고 그것은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자본주의 외부로 나아가 대안공동체를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방)정부의 정책에 입각하여 사회적 경제 영역의 발전시키는 차원에서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 혹은 완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자립성’이라는 기준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다면 청년들로 하여금 또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좋은 집과 많은 소비’가 아니라 ‘함께 모여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행복’의 가능성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노동시장에서의 경쟁 완화, 청년 니트의 감소와 연관될 수 있다. 그리고 쉽지 않겠지만 그러한 가치들이 국가 차원에서의 문화 변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더욱 자립성이 높아지고 경쟁이 완화되는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공성과 대안공동체를 지향하는 방향성은 특히 ‘지역’이라는 범주와 친화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더욱 지방정부 차원에서 실험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 같다.  청년 니트는 대체로 학교와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청년으로 정의된다. 청년 니트는 헬조선에서 마상을 입고 적극적인 사회적 삶을 뒤로하고 고립에 처한 존재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들은 대체로 적극성, 주도성을 지닌 대상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쉽기 때문에 청년 니트의 ‘발굴’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게 되는 것 같다. 돌아다니면서 강제로 끌어내지 않는 이상 ‘발굴’은 쉽지 않다. 안정된 집, 결혼 및 육아,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돈 많이 버는 직장이라는 ‘정상 루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은 많은 청년들을 강제로 니트로 만들어 버린다. ‘비정상’은 곧 소외이고 불행이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모든 청년들의 정상 루트로의 진입이라는 생각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정책 실험을 통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추진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롭게 믿고 기댈만한 것이라면, 청년 니트들이 다시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중요한 제도가 될 것이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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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에너지 생산하고 판매까지... 이런 동네, 가능합니다
▲  시민들이 기후위기에 대응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언플래쉬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협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에너지 전환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에너지원을 바꾸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에너지를 소비하는 태도 전반에 걸친 변화를 포함합니다. 작게는 일상에서 에너지 사용 습관을 바꾸는 것부터 도시의 구조,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변화, 에너지 소유와 통제 시스템까지. 에너지 전환을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에너지를 어떤 식으로 전환할지, 우리 일상을 바꿔야 하는 문제에 대해 보다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고 협력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에너지자립마을은 주민들 스스로 마을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주민들이 에너지 생산, 공급에 직접 참여하여 에너지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지역의, 일상의 에너지 전환을 만들어 간 국내외 에너지자립마을의 사례를 통해 시민주도의 에너지 전환의 의미와 기후위기의 대응에서 시민협력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상상하고 나누는 노력, 에너지자립 마을 성대골 성대골은 서울시 동작구 상도 3, 4동 성대시장에 자리 잡은 도시형 마을입니다. 대도시 안에 있는 에너지자립마을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2011년부터 지금까지 에너지 전환을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는 국내의 대표적인 에너지자립마을입니다. 성대골 마을은 일본 후쿠시마 제 1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주민들을 중심으로 ‘절전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주민 스스로 에너지 강사가 되어 학습과 실천을 통한 변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또한 에너지 문제를 다루는 기업을 만들자는 데 뜻을 모으며 ‘마을닷살림' 협동조합을 만들고, 마을기업 ‘에너지 슈퍼마켙’도 열었습니다. 특히 여성, 청소년, 다문화, 인권, 노동 등 성대골에 함께 있는 다양한 활동 커뮤니티와 연결됨으로써 주민 중심의 에너지 전환운동이 확장되고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성대골의 에너지 전환운동은 ‘서울시 원전하나 줄이기 정책'에 반영되어 에너지자립마을을 만드는 파트너로 함께 성장했고, 일상의 실천을 넘어 시스템적인 변화에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전기요금 정상화를 위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시민회의를 조직한 것도, 온실가스 총량을 줄이지 않는 국가에 대한 소송도 성대골에서 제안하고 적극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성대골 마을의 활동 원동력은 참여하는 주민들이 에너지자립의 필요성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쓰는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고, 절약과 효율로 내가 쓰는 전기를 먼저 줄이는 것부터 시작한 후 자연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까지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도시민에게 저 멀리 떨어진 발전소와 송전탑을 거쳐 이 전기가 나에게 오는 동안 누군가의 희생과 부담이 있었을지 상상하고 나누려는 노력. 에너지전환은 이런 시민 스스로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실천과 이를 지원하고 확대하는 정책이 함께 해야 가능할 것입니다. ▲  성대골 마을기술학교의 ‘우리집 그린케어'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성대골 전환센터 '우리가 바꿀 수 있다' 오스트리아 무레크 에너지 전환 오스트리아의 무레크(Mureck)는 몇몇 주민의 아이디어로 마을에서 바이오디젤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 아이디어에 동의한 지역 농민 200명이 조합원으로 참여해 에너지 협동조합(SEEG)을 설립했습니다. 농민들은 협동조합의 설립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운영을 위해 주민들의 투표로 임기제 사장을 선출하거나 주요 사항을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에너지 전환이 자신들의 일이 된 무레크 주민들은 지역의 대학과 산학협력을 통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매뉴얼에 따라 적극적으로 바이오에너지 생산에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폐식용유 등 마을 자체에서 생산하는 연료로 지역의 난방, 주유 등의 에너지를 100%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쓰고 남은 70%의 잉여에너지는 다른 지역에 판매하여 수익까지 만들어냅니다. 지역 주민으로부터 시작한 아이디어가 주민들의 지지로 길을 열고,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해 개인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그 개인들의 행동이 모여 커다란 변화를 일구어낸 것. 무레크의 지역 주민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직접 겪었습니다. 그리고 주민의 참여와 협력이 이 지역 전체의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며, ‘우리가 해낼 수 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취감을 가지게 된 무레크 주민들은 이후 지역의 목재를 활용한 열에너지 전환과 전력 분야의 자립 등 에너지 전환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해나갑니다. 이처럼 중앙 정부의 주도로 진행한 하나의 정책이 아닌, 주민의 주도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실험과 성공은 그 지역 주민들의 또다른 동력이자 귀한 자산이 됩니다. 무레크의 사례는 인근 지역인 그라츠(Graz)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라츠는 지역에서 생산할 에너지의 다양한 원료를 주민들의 일상에서 효과적으로 얻기 위해 지역 주민들과 앱(App)을 통해 폐기물의 정보와 수거방식 등을 적극적으로 공유했습니다. 특히, 주민들이 매뉴얼대로 폐기물을 버릴 뿐만 아니라 직접 폐기물의 사진을 촬영하여 앱에 업로드하면 GPS 기반으로 폐기물의 빠르고 정확한 수거로 이어지는 방식은 작은 실천을 통해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주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성취감을 안겨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라는 자기효능감은 개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도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줍니다. ▲  유채로 바이오디젤을 만들고 있는 무레크 마을의 모습 ⒸSEEG Mureck 홈페이지 시민 중심의 에너지협동조합을 통한 에너지 전환 독일의 재생에너지 협동조합 역시 시민참여를 통해 에너지 민주주의를 실현해 온 의미 있는 사례입니다.독일의 재생에너지 생산량은 1990년대만 하더라도 전체 생산 전력의 3.1%에 불과했지만, 2018년 기준으로 40%를 넘기며 발전원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에너지전환에 대해 전문가들은 오랜 기간 에너지전환 기조를 유지하며, 사회적 합의를 발전시켜온 가장 큰 동력으로 '주도적 시민참여'를 뽑았습니다. 에너지경제연구원(2019)에 따르면 협동조합의 장점은 재생에너지 생산을 통해 창출한 경제적 수익을 분배한다는 점 외에도, 조합원들의 투명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돕는다는 데 있습니다. 주식회사와 달리 주민 모두가 동등한 의결권을 가짐으로써 지역의 에너지문제 해결과정에서 자발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에너지전환을 통한 협동조합 배당금(실질적 수익)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재생에너지 사업이 지역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내 손으로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효능감과 만족감 덕분이기도 했습니다(프레시안, 2020). 확대된 시민의 역할을 바탕으로 진행된 지역의 에너지전환은 실제 에너지 공급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기존 화석연료가 바탕이 된 중앙집중식 전력수급 체계와 달리, 지역 단위의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도출된 해결책은 자급이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만들고 남은 에너지는 판매함으로써 중앙정부도 협동조합 활성화를 적극 권장하고 지방정부의 거버넌스를 확대해가고 있습니다. 시민 중심의 에너지전환이 지역을 넘어 중앙 정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요. ▲  독일 재생에너지 기반 발전량과 에너지 협동조합 개수의 변화 (1990년~2017년)Ⓒ독일에너지전환대화(2018) 에너지 전환 속 시민주도성 국내외 에너지자립마을의 사례는 훨씬 많고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함께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 지구적 위기에 우리 스스로, 함께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이 그만큼 확장되었기 때문이죠. 우수한 에너지자립마을의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은 ‘시민주도’입니다. 에너지 정책의 파트너로, 변화의 주체자로, 의사결정자로, 다양한 시민주도 에너지 전환활동을 통해 시민들의 협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전환은 삶의 전면적 전환이고 국가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자리에서부터 에너지 자립을 실천하고 그 실천의 마음들이 계속 연결되어야 합니다. 빠띠도 에너지 전환을 위해 작은 실험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린워싱을 주제로 시민들과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함께 협력해 공익데이터를 만들어 보는 데이터실험 활동(링크)입니다. 시민주도는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해 작은 행동과 협력 이런 경험들이 서로를 성장시키며 우리 모두의 일로 공감을 확장하는 것에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확장된 연결들이 사회 변화의 축이 되어 시민이 중심이 된 에너지 전환을 더 많은 일상과 마을에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 우디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활동가 / woody@parti.coop 이 글은 오마이뉴스, 빠띠 홈페이지, 빠띠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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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시설에서 탈출한 얼룩말은 동정과 귀여움의 대상이 되고, 마찬가지로 시설에서 탈출한 장애인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만약 얼룩말이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다친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어떻게든 제압해서 안전하게 시설에 가두어야 할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얼룩말과 장애인은 과연 구분될 수 있었을까. 누구의 평화이고 누구의 폭력인가. 평화와 폭력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수시로 반복하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위험이고 누구의 안전인가. 시설은 누구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가. 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도 얼룩말에게도) 위험천만했던 얼룩말의 탈출을 그토록 재빨리, 우연히 일어난 귀여운 에피소드로 취급해버리는가? 그것은 무엇을 지워버린 채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인가? 지워지는 건 무엇인가? 그 평화로운 일상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가 위험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장애인은, 존재 자체가 그 위험을 증언하고 있기에 위험한 존재가 된다. 위험한 존재의 등장을 사람들은 반기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일상을 다시 보게 만들고, 폭력의 시스템에 실은 동조해왔음을 자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언은 언제나 예언이다. 다치거나 아프거나 늙으면 당신도 시설로 들어가야 한다고, 실은 학교나 군대나 감옥이나 공장까지도 시설의 또 다른 종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형제복지원처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갑작스레 위험한 존재가 되어 시설에 가둬지곤 한다는 것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라고 과연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역사를 통틀어 당대에 사랑받는 위험한 예언자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희망은, 거대한 폭력의 연쇄에 가해자로 연루되어 간 사람들이 아니라, 예언자의 말을 들을 줄 알고 간신히 산속으로 낯선 땅으로 도망쳤던 사람들일 것이다. 얼룩말은 그 온 몸으로 내달려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하철에 타는 장애인들은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몸뚱아리 밖에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제 몸으로 깎아가며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럴 때 문제는 말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에 있기 마련이다. 이 글은 제 페이스북에도 동시에 업로드 되었습니다. 
장애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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