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운 : 23년 1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1월 2일 저녁에 잠에 들려고 오늘 뉴스를 뒤적이다가, 글자를 읽는데 눈에 불이 튀었습니다(..) - 시위 중인 사람이 탄 전동휠체어의 전원을 꺼? 전동휠체어의 컨트롤러를 손상시키는 방식으로 시위를 막았다? - 진압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효율적인 방식의 대응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진압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니 치가 떨리게 모욕스러웠습니다. 어쩌면 관심 없는 대중들에게 기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정부의 입장과 대처가 고작 이 정도라니. 정부가 지키지 않은 약속은 뉴스에서 크게 나오지도 않더라고요. 서울시장은 1분만 늦어도 큰일 나는 서울의 지하철이라고 우스운 호들갑까지. 오히려 최근 끊이지 않는 서울교통공사의 사고빈도수와 인력감축, 그리고 지금의 정부가 재난 아닌가 싶었습니다. (오전 7시 34분경에도 지하철 궤도장애로 인한 지연이 있었지만 이 부분은 실시간으로 고지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전장연과 시위에 함께 하기도, 전장연을 향해 욕을 퍼붓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백 번 양보해봤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져 각자의 생존투쟁만으로 바쁘고, 좁은 시야의 세상에서는 나의 생존투쟁만 보이는 법이니까요. 공론장에 숙고한 의견을 던지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빠르게 끝나버리는 것도요. 그날은 정말 오만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세상은 나아졌을까? ㅡ 제 동생은 지체장애 1급이고, 저는 그런 동생과 (독립하기 전까지) 24년쯤 같이 살았습니다. 가끔은 시혜적일 수 있는 누군가의 손길도 고마울 때가 있었고요. 그럴 땐 그 사람을 곡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세상의 마지노선을 고려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 모두의 올바름은 일치할 수 없고, 어쩌면 일치해서도 안되는 법이니까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디가 문제일까. ㅡ 일단, 장애인도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것, 모두가 이동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에 비동의하는 시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시위 방식에 대하여는 출근시간을 지나서, 5분 이상을 지연시키지 않을 것은 전장연도 동의한 사실이고요.) 무엇보다 이동권은 모든 권리의 기초에 있습니다.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면 교육권이고 노동권이고 나발이고 다른 모든 권리가 어불성설이라는 건 모두가 동의하실 거예요. 헌데 아직도 여기라니. 처음 저상버스가 도입되고 몇 년. 제가 대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동생과 영화를 보려고 '그래, 우리 동네엔 저상버스가 있다!' 하는 생각에 동생을 따뜻하게 입혀서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세상을 꽤 호락호락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버스 세 대가 그냥 우릴 지나쳤습니다. 한 대는 "지금 시간이 밀려가지고 미안해요." 하셨고, 다른 한 대는 "이 차는 이거 안 쓴 지 오래돼서 안 내려가요. 미안해." 하고 가셨어요. 마지막 차는 그냥 사람들이 타느라 우리가 밀렸습니다. 먼저 올라간 다른 남자분이 도와줄까 말까, 운전기사분에게 우리가 아직 타지 못했다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문은 닫혔고요. 바람이 차갑더라고요. "상혁아, 우리 못 가나 봐." 사람이 존엄과 권리를 잃어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날이 추웠습니다. 다음부터는 굳이 저상버스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3시간을 기다려도 교통약자 택시를 불렀어요. 주로 사람이 없는 조조를 보러 갔으니, 동생이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택시를 예약했습니다. ㅡ 동생과 사는 일상에서는 항상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보통' 밖으로 쉽게 밀려났고, 간간히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어 우리를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동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꼭 '정상 신체'를 갖고 있는 누나와의 동행을 원했습니다. ㅡ 그리고 (운이 좋게도) 우리의 가정에 아버지가 돌아오면서부터 동생의 이동권은 조금 보장받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크게 신체가 자라지 않았지만, 몸 전체의 근육이 굳어 꽤 무겁거든요. 통나무만큼이나 뻣뻣하고 무거워요. 그래서 이후로는 아버지가 동생을 도맡았습니다. 가정으로 돌아온 가부장분 덕에 우리는 종종 여행이라는 걸 다닐 수 있었습니다. 물론 휠체어 약자 시설이 되어있지 않은 지역이 많아 동생은 주차장에 있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한 번은 배를 타야 하는데, 항구까지 계단이 족히 200개는 되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결심한 듯이 동생을 둘러업었고 나와 엄마는 휠체어를 들었어요. 배의 출발 시간은 임박해 오고, 내딛는 아버지의 다리가 점점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도 보였습니다. 땀이 흐르는 것도 보였고, 길 가던 사람들의 멈춰 선 시선도 느껴졌습니다. 통통배의 갑판에는 선장님과 사람들이 나와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고요. 어쩌면 내 동생은, 가정에서 동생의 권리 보장을 분담해주고 있기에 상황이 나은 셈입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66세고, 이 체력도 몇 년 안 남았다는 걸 압니다. ㅡ 작년에 한창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로 신문과 sns가 시끄러울 적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세금으로 혜택 받는 놈들" 이런 얘기. 역시 모욕적입니다. 사실 관계를 따져보지도 않고, 단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세금의 혜택'은 동정이 아닙니다. 불쌍해서 던져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애초에 기초적인 권리의 보장은 가정 단위의 역할이 아니기도 하고요. 사회에서 1인분의 정상성을 인정받기 위한 노동은 필수고, 아까도 말했지만 노동권을 보장받으려면 가장 기초적인 이동권과 교육권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이동권과 교육권을 박탈당한 삶에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없습니다. 생길 수가 없으니까요. 딛고 있을 지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의 존재를 증명해 줄 타인은 고작 혈연 가족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저는 ㅡ명화원에서 일했던 엄마를 통해ㅡ 일찍이 혈연 가족에게 버려지는 사람들을수없이 봤습니다. 그래서 기초적인 권리의 보장은 가정 단위의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ㅡ 또한 사회적 약자는, (우리 모두 알다시피)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인 '약자성'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특정 요소를 '약자성'으로 구성해 내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기준과 제도입니다. 모두가 기억하는, 우리 사회와 도시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유럽에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부랑자와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제한적 공간에 수용되기 시작했고요. 사회의 효율과 편의를 위한 명분은 당시의 의료와 정신분석의 영역이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들의 권리를 보장해야만 합니다. 효율을 위해 사회가 박탈한 개인의 권리이기 때문에, 이들은 세금의 혜택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소수라는 이유로 사회적 시스템이 부족하다면, 사회는 적극적으로 그 시스템을 합의해 나가야 합니다. ㅡ 적어도 '무정차 통과'라는 방법으로 공론장을 폐쇄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공론장에서 목도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고, 마주친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 이 사회적 불화에 대한 각자의 결론을 도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좁은 지하철 플랫폼에 수백의 경찰을 데려다 놓고 대립구도를 키우고, 시민들에게 재난문자 따위로 상황을 고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ㅡ 그것이 올바른 방향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올바른'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약자성', 이 '소수자성'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인정하기 싫을지라도.) 신체 장애인은 단지 그 소수자성이 시각적으로 신체의 전면에 부착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체 기능의 장애'라는 소수자성이 '아주 특정한 결함과 손실'로 여겨지는 이유 역시 사회에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도 장애인이 될 지도 모르는데, 장애인의 권리 보장에 앞장서야죠." 라는 말의 전제가 틀린 이유이기도 하고요. 신체 기능의 장애를 치명적인 결함으로 여길수록, 우리 사회가 가진 신체기능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아주 강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에 반해 '모자란' 신체기능은 더욱더 부각될 수밖에 없고, 그건 우리 사회가 가진 조건 역시 매우 편협하다는 반증이죠.  다시 한 번, '장애'는 '결함'이 아닙니다. 비신체장애인이 가진 다른 소수자성이 단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될 뿐입니다. 자본의 정도/직업의 유무/노동의 계급/성별/인종/퀴어/노동조건/육아/출산/외모/연령/질병/상태/학력/지역/연봉/신체기능의 다름/정상가족/ … 얼마나 많게요. 이렇듯 비장애인 역시 수많은 카테고리에서 탈락당할 수 있는 다양한 소수자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마 탈락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나마 상대적으로 보장받은 권리의 영역에서 각자 노력하고 노력해서 각 스탯을 커버해 나갈 수 있을 뿐일 거예요. 이렇듯 장애도 본질적 결함이 아닌, 이 모든 것들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소수자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여전히 누군가의 소수자성이 '결함'으로 느껴진다면, 그리고 '결함'이 맞다는 정치적 의견을 고수한다면 다음 사회 안전망에서 밀려나는 건 내 차례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정말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잃게 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존재 위치는, 그 연결이 지켜줄 것입니다. 당신 권리의 연장선상에 내 권리가 닿아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아무리 각자의 생존투쟁이 치열해도, 우리가 그 연결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적어봅니다. 누군가의 선의를 믿을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고, 올해에도 그 선의의 마지노선이 우리 사회의 많은 합의를 구성해 나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그래서 저는 전장연 활동가 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를 서로 마주치게 하는 그 소란스러운 투쟁이 자랑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존재의 자리를 지키는 투쟁에 응원을 보냅니다. -  위 글은 1월 3일자에 개인적으로 작성했던 글을 옮겼습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애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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