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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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제 2의 남성이 아닌 또 다른 신체' 평등한 여성의 몸을 말한다 #2
2021년 10월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을 찾았다. CT를 찍어보니 난소에서 발생한 출혈로 내장과 생식기관 등을 감싸는 복강에 혈액이 차 있었다. 당시 인과성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백신 접종 후 부정 출혈 또는 월경 패턴의 변화를 경험하는 사례들이 온라인에 공유되고 있었다.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월경이 예정보다 늦어져 백신 부작용을 의심했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출혈이 부작용일 가능성은 작다고 했다. 더불어 월경이 2~3개월 미뤄지는 건 스트레스로도 가능하고 큰 문제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코로나19 백신은 개발이 신속했던 만큼 안전성에 대한 우려도 높았다. 이에 질병관리청은 2021년 2월 26일 접종을 시작하며 백신 이상 반응을 수집했다. 하지만 ‘월경장애’ 선택지는 8개월이 지난 10월이 되어서야 생겨났다. 온라인에서 여성들의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실시한 추적 보고에도 처음에는 월경장애 항목이 없었다. 하지만 미국 일리노이대 의료인류학과 케이트 클랜시 교수가 올린 트윗을 계기로 모인 부정 출혈 및 월경불순 사례만 14만 건에 이르렀다. CDC는 자체 조사에 착수했고, 미국국립보건원(NIH)은 코로나 백신과 월경불순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사례가 모였는데, 왜 임상 단계에서는 이런 점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임상 실험 참여자들에게 월경 패턴 변화에 대한 질문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의학계의 오래된 풍토가 자리 잡고 있다. 근대 해부학이 출발한 17세기부터 70kg의 성인 백인 남성은 인간의 표준형으로 간주되었다. 생식기관을 제외하고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과 다르지 않게 여겨졌다. 이러한 전제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례는 아주 많다. 한 예로 1980년대에 이뤄진 한 연구는 아스피린이 심장마비를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남성만을 대상으로 했다. 1990년대에 여성에게 같은 연구를 수행하자 심장마비 위험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1992년 미국 식품의약청(FDA)은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약의 인가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약물 시험에서 여성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고, 설사 여성이 다수 포함되어 있더라도 결과를 해석할 때 성별에 따른 차이가 고려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1993년 미국에서는 NIH가 지원하는 연구는 임상 연구에 여성과 소수 인종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굳어진 의학계의 시스템과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97년에서 2000년까지 FDA에서 판매를 중단시킨 약물 10개 중 8개는 여성에게 더욱 유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중 네 개는 여성에게 더 자주 처방되어 부작용 사례가 더 많이 보고된 약물이고, 나머지 네 개는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하게 처방되었지만, 여성에게 더욱 해로운 영향을 미친 약물이었다. 후자는 여성과 남성의 생리학적 차이가 원인이 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2014년에 발표된 노스웨스턴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동물실험의 22%가 성별을 명시하지 않았고, 명시한 실험 중 80%는 수컷만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NIH의 법이 통과된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사람이 아닌 동물을 활용하는 전임상 단계부터 설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코로나19 백신 사태를 보면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은 것 같다. 2022년도 7월 미국 세인트루이스워싱턴대와 일리노이대 연구진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절반에 가까운 여성들이 백신 접종 후 월경 이상을 경험했다. 2022년도 8월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코로나19백신안전성위원회는 빈발 월경 및 출혈, 이상자궁출혈 발생 위험이 코로나19 예방접종 이후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으며 인과관계가 있음을 수용할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백신 접종을 시작한지 약 1년 6개월이 지나서야 이뤄진 발표이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가 다르다는 증거는 나날이 쌓이고 있다. 앞으로는 성별에 따른 영향이 충분히 탐구되어 여성이 제 2의 남성이 아닌 또 다른 신체로 여겨지기를 기대한다. 작성자: 노다해복잡계 연구의 대표적인 대중서 <세상 물정의 물리학>을 읽고 통계물리학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위대한 여정은 척척석사로 마무리할 예정이다(23년도 8월 졸업). 복잡계 '연결'망을 연구한 만큼 '연결'하는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과학과 대중 사이에,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 사람과 사이에 다리를 놓고 싶다.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관심사는 그 밖의 모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읽고 쓰는 재미에 빠져 책 모임과 글 모임을 오랫동안 꾸려왔다. 출처본 글은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에서 제작한 콘텐츠로,  ESC에서 운영 중인 과학기술인 커뮤니티 '숲사이(원문링크)'에 등록된 정보입니다.ESC: https://www.esckorea.org/숲사이: https://soopsc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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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어때서!' 평등한 여성의 몸을 말한다 #1
@ British Vogue May 2018 Magazine Models Cover 미국 힙합 가수 잭스의 노래 Victoria’s Secret은 이렇게 시작한다. “God, I wish somebody would've told me when I was younger that all bodies aren't the same”(참, 내가 어릴 때 누가 좀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의 몸이 전부 같진 않다고) 깡마른 모델을 내세우고, 청소년기 여자아이들을 거식증으로 내몬다는 비판을 받아온 패션계에 바디 포지티브(body-positive) 운동이 퍼지고 있다. 한때 전속모델 ‘엔젤’을 내세워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제시하던 빅토리아 시크릿은 결국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에 빅토리아 시크릿은 달라진 소비자 가치를 인정하고,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모델을 선정했다. 이제 전문 모델 대신 IT기업 투자자, 축구선수, 사진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들이 빅토리아 시크릿의 홍보대사로 활동한다. 외모보다는 여성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브랜드의 가치로 삼겠다는 것이다.유튜버 치도(CHEEDO)는 국내 1호 내추럴 사이즈 모델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사이즈를 대표한다. 유튜버 치도는 샌드박스 및 스파오와 협업하여 <사이즈 차별없는 패션쇼>와 ‘사이즈 차별없는 마네킹’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남성 190cm, 여성 184cm에 달하던 마네킹 키는 우리나라 평균 신장을 반영해 172cm, 160cm가 되었다. 국내 브랜드 더잠은 동양인에 맞춘 26가지 사이즈의 속옷을 출시하고, 체형에 따라 속옷을 추천해주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이 밖에도 컴포트랩, 비브비브, 에어리 등 여러 국내외 브랜드가 다양한 신체 사이즈를 제품에 반영하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에 나는 인생 최저 몸무게인 58kg를 기록한다. 이 몸무게는 굶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직후, 한 남자 선생님께서 내 얼굴을 보더니 ‘얼굴이 보름달이 되었네’라고 하셨다. 스스로 통통하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던 나는 충격을 받아 극단적인 식단조절을 했다. 밥을 정말 새 모이만큼 먹었다. 체력 유지를 위해 점심/저녁 시간에 뛰던 줄넘기는 그 수를 배로 늘렸다. 그렇게 58kg가 되었다.이 몸무게는 나의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학업 성적은 떨어지고 기운은 없었다. 극단적인 식생활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이어졌고, 결국 1학년 여름방학에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치료 과정에서 몸무게는 다시 62kg로 돌아왔다. 그 이후 나는 극단적인 식사량 조절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내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데 필요한 식사량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몸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몇 년 전 여자 아이돌 남자 아이돌 가리지 않고 예뻐서 좋아한다던 동생이 있었다. ‘살을 빼야지’하면서도 운동을 게을리하거나 음식량을 조절하지 못하면 스스로 자책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폭식으로 이어졌다. 선망의 대상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을 미워하던 그 친구에게 나는 별다른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직접 경험하는 것과 다른 이를 설득하는 것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당시에는 바디 포지티브 운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다양한 사이즈와 형태의 신체의 사람들이 자신 있게 살아간다. 이제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도 된다고 좀 더 쉽게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예전에 여성이 운동하면 늘씬한 몸매를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다르다. ‘예쁜 몸’보다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한다. 그리고 근육이 있는 여성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근육이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어>라는 책 제목을 보시라. 패션 잡지 보그 코리아는 <근육 있는 여자들>이라는 주제로 화보를 제작했다. 이제 여성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 근육이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어 @ 패션 잡지 보그 코리아 근육 있는 여자들  작성자: 노다해복잡계 연구의 대표적인 대중서 <세상 물정의 물리학>을 읽고 통계물리학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위대한 여정은 척척석사로 마무리할 예정이다(23년도 8월 졸업). 복잡계 '연결'망을 연구한 만큼 '연결'하는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과학과 대중 사이에,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 사람과 사이에 다리를 놓고 싶다.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관심사는 그 밖의 모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읽고 쓰는 재미에 빠져 책 모임과 글 모임을 오랫동안 꾸려왔다. 출처본 글은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에서 제작한 콘텐츠로,  ESC에서 운영 중인 과학기술인 커뮤니티 '숲사이(원문링크)'에 등록된 정보입니다.ESC: https://www.esckorea.org/숲사이: https://soopsc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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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No만 정답인가요? - 섹스의 진부화된 의사소통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다시 구성하기
으레 페미니즘은 당위적인 성평등으로 쉽게 일컬어진다. 그럴싸하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달라야 한다. 그것은 이 얘기의 첫 문장을 확장하는 데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 여성이 마땅히 존중받는 조짐이나 분위기를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페미니즘 학문에 박식한지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말 수가 적고 비교적 덜 마초적인 남성이 페미니즘의 감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습득한 페미니즘적인 배움은 천대받던 '여성적' 공감과 이해 능력을 재해석하고, 감정의 중요함을 밝혀내는 일이며, 이러한 공감능력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일컬어 덕목으로 부르기였다. 감정은 의외로 개인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다. 전희경, 마사 누스바움,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감정이 지니는 정치적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약자가 억압이나 차별에 직면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무능력일 뿐이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139쪽 "문학(적 상상력에 깃든 공감과 연민 등의 감정)은 삶의 부박함과 인간의 비속함에 맞서 어떻게 생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는지, 비통하고 억울한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를 되돌려 줄 수 있는지 등을 묻는다. 문학은 본디 시대의 총체에 관여하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우리는 어떤 변화도 꿈꾸기 어렵다. 문학은 폐허가 된 이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아 탐사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과 현상들 너머엔 복잡하고 신비로운 삶의 진실이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진을 치고서 구체적 삶의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입체적으로 탐색하고, 생명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66-67쪽 "감정의 부재는 합리성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조장하지도 않는다.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상'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감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101쪽 구체적 삶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탐색하면, 마침내 단일한 상황에서 인간 감정의 정동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섹스의 조짐을 마주친 여성들은 마음 속으로 각자의 혼돈을 겪는다. 그럼에도 자기와 불화하는 '단순한 (부)동의'를 명확하게 결정할 것을 강요당한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예스 means 예스", "노 means 노"라는 명료한 정치적 구호로 가시화될 수 있었지만, 진실은 이 결정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순탄히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적자기결정권 담론이 띄워진 이후 많은 여성들이 사뭇 찜찜한 채 명확한 (부)동의 표현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내몰렸다. 정확한 의사표현만이 자신의 주체성과 권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혼동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함에 "예"를 던져놓고 왠지 불안한 섹스를 한 여성들이 있다. 막연히 급한 것 같은 예감에 "아니오"를 말하고 내심 아쉬워하는 여자들이 있고, 이들은 자기모순에 혼란스러워도 한다. 결정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결정의 지난한 과정이 보호받을 권리였을 것이다. 언제나 변화하는 마음가짐과 속도에 따라서, 결정과정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갈 기회가 여성에게 구조적으로 주어졌어야 했다. 섹스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순간에 사람은 명확하고 단순한 "예"와 "아니오"를 발설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유부단한 마음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이다. 주저하는 건 한낱 회피일 뿐이고 모든 것에 명확한 답을 내리는 자세만이 정정당당하다는, 기존의 남성적 도덕으로는 페미니즘의 감수성에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예"와 "아니오"라는 최종적인 대답을 듣고 반응하는 것을 상호간 좋은 소통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침묵과 더듬대는 말씨, 떨리는 눈동자와 시선의 외면과 두루뭉술한 문장을 포함한 모든 반응에 상호작용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을 갖춘 더 효과적이고 나은 소통이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 그 불확실하고 지지부진한 과정 속에서, 섹스를 하고 싶으면서 하고 싶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섹스가 아닌 대안적인 애무로 이 사이를 초대하고 싶은 욕망도 성실히 검토한다. 때로는 마주보는 것만으로 멈추고 싶어하며, 어떤 이는 BDSM적인 사이를 원하지만 스스로 비밀스러워 어떤 대답도 주저한다는 가능성도 훤히 열어젖힌다. 그 은밀한 언어적, 비언어적인 조짐을, 우리는 기다리고 눈치챔으로써 성적으로 자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더욱 더 밀접해진다. 그리고 다른 어느 관계의 도식이 아닌 우리 서로의 관계에서, 가장 알맞은 속도와 방식으로 상호 동의된 섹스를 향하여 수렴한다. 결국 모든 것은, 남성적으로 부패하여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과정이다. 상대의 진짜 의사를 살피다보면, 상투적이고 강압적이고 무책임한 도덕주의적 언어로부터 멀리 떠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그렇게 우리는 감각을 활짝 열고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만난다. 차츰 더 정직한 성적 이해를 꿰어나가게 된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섹스를 하지 않을 때에도 관계의 조짐이 달라지는 수많은 경우들을 본다. 이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섹스는 사실상 인간관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관계를 위한 실천에 더 좋은 섹스를 위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은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것과 상통한다. 예컨대 누군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특정한 비주류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를 마주한 상대방으로서 그의 비주류성에 관해 소통할 때에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상대의 궁극적인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비법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비주류성을 지닌 자에게 진부한 언어는 익숙한 절망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페미니즘과 퀴어성, 우울을 고루 아는 사람들이라면, “우울”과 “퀴어성”을 호명하는 오염된 언어 때문에 자길 설명할 길을 잃고 고독해진다. 쉽고 진부하고 얄팍해진 언어는 그들 앞에서 힘이 없거니와, 오히려 인간을 고독 속으로 넣는 뜻밖의 힘을 낸다. 이에 그의 단일한 맥락과 외로움에 좀 더 뾰족하게 접근하는 언어를 써야지,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공감이 가능하다.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언어-느낌-인식’으로 이루어진 고루한 패턴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고유한 감정을 설명하지 못해 머리 찧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평범하고 보편적인 언어에 대항하는 이해방식이다. 그렇게 보통의 억압적인 섹스가 아닌 주체적인 섹스를 설계해나갈 수 있다. 그동안 "예"와 "아니오" 또는 어떤 도식화된 말로는 풀어낼 수 없었던 여성의 정동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들춰내면 된다. 요지는 상대의 동의와 거부를 최종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과정을 함께 밟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여성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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