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는 시민의 ‘역량’을 높이려 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작년 7월,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습니다. 1964년 운크타드 창설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나라는 우리나라가 처음이라고 합니다.(한겨레, 20210704)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에 이를 자랑스러워 하며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로 성장했으며, P4G 정상회의 개최와 G7 정상회의 2년 연속 초청 등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이 높아지고 역할이 확대되었다”고 말했습니다.(브릿지경제, 20220706) 올해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 글로벌 수출 7위의 무역 강국, 종합군사력 세계 6위, 혁신지수 세계 1위의 당당한 나라가 됐다"며 “세계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됐"다며 자부심을 보였습니다.(한국일보, 20220301) 한국이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세계 경제 순위이며, 그것은 곧 ‘국내 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와 동일시 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 차원의 부의 증대는 국민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낫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GDP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국가의 경제 규모가 중요하고 경제의 성장이 지상과제가 됩니다. 하지만 다른 지표들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 기준 상대적 빈곤율은 16.7%로 OECD 4위, 노인 빈곤율 2018년 기준 43.4%로  OECD 1위라고 합니다.(MBC, 20220303) 한국사회의 불평등 지표인 가처분소득, 지니계수, 상대적 빈곤율은 OECD 국가중 최하위 수준입니다. 복지 예산은 GDP 대비 10% 정도로 여전히 다른 모든 선진국보다 낮은 상황입니다.(오마이뉴스, 20220225) 국가 차원의 총 부는 선진국일지 모르겠지만, 개개인들의 삶들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GDP 중심 접근의 협소함을 넘어이 글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GDP 중심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를 간략하게 소개하려 합니다.(*주의: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간략하지 않을 수 있음) 아래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는 내용 전부는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의 창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책과 책 저자의 아이디어에 대한 소개이기도 합니다. [GDP 접근법]은 1인당 GDP 증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잘살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GDP 접근법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1] 측정하기 쉽습니다. 화폐가치를 기준으로 여러 재화와 서비스를 비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 투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3] 경제성장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설정될 수 있습니다.  GDP 접근법에 대한 옹호는 ‘트리클다운(낙수) 이론’에 기대고 있습니다. 국가의 경제성장에 따른 구성원 개개인의 물질적인 삶의 증진이라는 상관관계는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의 양극화 현상등을 통해 낙수 이론은 점점더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GDP 개념이 [1] 돈이라는 협소한 관점에서, [2] 부의 분배를 고려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게다가 [3] 삶의 질을 이루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단일한 수치로 나타내고자 하니 양극화도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적인 필요와 만족 등을 파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량 접근법’의 정의와 간략한 설명아마티아 센, 마사 누스바움 등은 GDP 접근법을 역량 접근법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역량 접근법은 국제 개발 정책의 맥락에서 삶의 질 높이려는 가난한 국가에 초점을 맞춰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모든 국가가 인간의 역량 발전과 관련하여 정의 실현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말합니다. 역량접근법은 다음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누스바움, 2015. 28~29)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 될 수 있는가?”“사람이 누릴 수 있는 실질적 기회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역량 접근법]은 “삶의 질을 비교 평가하고 기본적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을 세우기 위한 접근법"이 할 수 있습니다. 역량 접근법은 “선택과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회와 실질적 자유를 증진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가 사람의 기본적 품위나 정의를 지켜주는지 비교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보며, “사람을 목적으로 보면서 총체적 잘살기나 평균적 잘살기가 무엇인지 묻고 사람이 어떤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살”피고자 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규정할 역량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량 접근법은 “가치다원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뿌리 깊은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 특히 차별이나 소외의 결과인 역량 실패에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에 따라 “사람의 역량과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것이 정부와 공공정책의 시급한 과제"라고 여깁니다.(누스바움, 2015. 33~34)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이 제안하는 역량 접근법의 목적이 “기본적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의 정립"이라고 말합니다. 근본적인 정치적 권리에 관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며, 인간존엄성, 최저수준, 정치적 자유주의 개념과 관련하여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부연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역량 접근법은 시작부터 윤리적이고 가치평가적"인 셈입니다.(누스바움, 2015. 34) 살펴본 바에 따르면 역량접근법은 GDP 접근법의 협소함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포착하고 현실화 하기 위해 인간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 구체적인 방법들을 고안하고 현실화, 정책화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는 현실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와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적 작업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진적인 방법이니 대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GDP 중심의 경제성장지상주의의 협소한 이해를 넘어 좀더 나은 인간다운 삶에 대해 고민하고, 사회가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역량’이란 무엇인가?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 [역량]은 “‘이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누스바움의 설명은 아마티아 센의 관련 논의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마티아 센은 역량을 “‘실질적 자유'이자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의 집합"이며 “사람의 역량은 성취할 수 있는 기능의 선택 가능한 조합"이라고 정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역량은 일종의 자유, 즉 선택 가능한 기능의 조합을 달성하는 자유"이기도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환경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자유나 기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35~37)  누스바움은 센의 논의에 더해 역량을 ‘결합역량’과 ‘내적역량’으로 구분합니다. [결합역량]은 “구체적인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기회의 총합"으로서 실질적 자유를 지칭합니다. [내적역량]은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며 유동적인 사람의 상태"로서 “훈련되거나 계발된 특성과 능력"을 말합니다. “결합역량은 내적역량에다 기능을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을 더한 것으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개념상 내적역량을 생성하지 않고 결합역량만 생성하는 사회는 생각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누스바움, 2015. 37) 쉽게 말하면 정치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실질적 자유로서의 역량(결합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훈련된 역량(내적 역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거나 독려해야 할 것들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역량]은 “계발될 수도 계발되지 않을 수도 있는 선천적 역량"을 의미합니다. 기본역량은 “누구나 강제된 기능이 아니라 선택하고 행동할 실질적 자유를 의미하는 결합역량을 최저수준 이상으로 가져야 한다"는 주장의 전제가 됩니다. 누구나 기본역량을 지니고 있고, 이끌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결합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최저수준 이상의 결합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 우대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 또한 뒷받침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테면 장애인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더 나은 사회인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38~39)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내적역량을 갖추고 결합역량에 도달하고 누릴 수 있는 잠재적인 기본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0대 핵심역량마사 누스바움은 지금까지 살펴본 역량에 대한 논의에 입각하여 인간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10대 핵심역량을 제시하며, 최소한 최저 수준을 보장 할 수 있도록 해야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10대 핵심역량의 정의와 그와 관련한 목표 설정,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측정은 GDP 접근법과 구별되는 역량 접근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생명life 인간은 누구나 평균수명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보장되어야 합니다. [2] 신체건강bodily health 인간은 누구나 건강, 적절한 영양 공급, 적합한 주거 공간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3] 신체보전bodily integrity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고,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적 만족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감각, 상상, 사고senses, imagination, and thought 인간은 누구나 “감각기관을 활용할 줄 알아아 하며, 상상하고 사고하고 추론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교육을 통한 (시민) 역량의 확보를 필요로 합니다. 교육은 경험, 사고력과 상상력의 동원할 수 있도록 하며, 정치적 표현, 미적표현, 종교 활동의 자유가 보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5] 감정emotions 인간은 누구나 “주변 사람이나 사물에 애착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슬픔, 갈망, 만족, 분노, 공포 불안 등 다양한 감정발달, 그 감정을 누릴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합니다. 이는 다양한 인간적 유대관계의 지원을 의미합니다.  [6] 실천이성pratical reason 인간은 누구나 “선 관념을 형성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삶의 계획을 비판적으로 성찰 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이 ‘실천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7] 관계affiliation 인간은 누구나 1)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른바 관계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 “자존감의 사회적 토대를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혐오와 차별 없이 존엄한 존재로 대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 인간 이외의 종other species 인간은 누구나 “동물이나 식물 등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9] 놀이play 인간은 누구나 “웃고 놀 줄 알아야 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10] 환경 통제control over one’s environment  인간은 누구나 1) 정치적 측면에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선택 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합니다. 정치참여의 권리와 언론 및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2) 물질적 측면에서 재산소유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부당한 압수수색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직장에서 인간답게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스바움, 2015. 49~50)10대 핵심역량의 각 항목들은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실천이성 역량]과 [관계 역량]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천이성 역량을 높이는 것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모든 핵심역량을 직접 파악하고 개선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 역량 덕분에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존중받"습니다. “공공정책에 관한 심의에서는 가족관계, 친구관계, 집단 간 관계, 정치적 관계 등이 구조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관계 역량은 다른 역량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합니다. 실천이성 역량과 관계 역량의 발전 속에서 모든 핵심 역량에 대해 이해하고 성찰하고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51~59) 이와 같은 [10가지 핵심역량 목록]은 시민들이 단순히 물질적인 부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를 누리며 좀더 높은 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수준의 구체적인 보장을 할 수 있도록 하고자 고안되었습니다. 그리고 10대 핵심역량을 모든 시민이 갖출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사회정의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회정의의 최저수준을 엄밀하게 정하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공간에서의 맥락에 따라 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 목록은 최종본이 아니며,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언제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누스바움, 2015. 51~59)  ?돈, 경제성장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는 아니다.국가와 기업은 경제성장만을 외치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돈만 좇도록 강제되는 것 같습니다. 경제성장도 중요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한 삶에 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가 되는 사회에서는 행복하게 살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극한의 무한경쟁 속에서 돈만 되면 무엇을 하든 용인되는, 대다수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화폐물신주의가 절대 바뀔 수 없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일까요? 혹시 다른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폐쇄적인 조건 때문일까요? 역량 접근법은 다른, 다양한 만족스러운 삶의 가능성을 고민해보고 실험해보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A 대신 B로의 총체적인 대체’와 같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역량 접근법에서의 논의들과 10가지 핵심역량의 현실적 적용 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하나씩 확장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경제성장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가 되는 것이 아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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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으로부터 생태주의를 배운다.
*이 게시물은 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 책의 6장의 일부를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용한 부분은 책의 페이지를 기입했습니다.  생태계의 복원력 제이슨 히켈에 따르면 “생태계 전체에 걸쳐, 예전 산림의 90퍼센트를 순전히 자연적으로 회복하는데 평균 66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때에 따라, 30년 이내, 21년만에 회복하기도 한다.(322) 생태계는 ‘복원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생태계의 복원력이 작동할 수 없을 만큼 자연을 착취하고 있는 셈이다.  탈성장이 답이다 자본주의의 성장이 생태계의 복원력 이상으로 자연을 식민화 하고 착취하는 주범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따르면 “궁극적으로 탈성장이 탈식민화의 과정"이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언제나 영토 확장 논리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왔다. 자본이 점점 많은 양의 자연을 축적의 회로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자본은 토지·숲·바다, 심지어 공기까지 식민화한다. 500년 동안 자본주의적 성장은 인클로저와 수탈의 과정이었다. 탈성장은 이 과정의 역전을 의미한다. 치유와 회복, 바로잡음의 기회를 의미한다.”(337)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좌파든 우파든 ‘성장'을 기본적인 전제로 두고 분배의 정도를 두고 다투게 된다. 하지만 성장을 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지구를 생명이 살기 어려운 정도로 몰아붙이기도 있다. 누군가는 급진적이라고 할 지 모르는 ‘탈성장'은 생존을 위한 긴급한 필요이다.  생태적으로 된다는 것. 애니미즘으로부터 배운다 작은 단위를 관찰하고 생각해보면 쉽게 배울 수 있다. 섬을 찾아 사는 정착민들은 섬에서 살기 위해 섬의 생물종과 공생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다른 생물종에 관심을 기울여 다른 종의 습성과 언어, 서로 관계 맺는 법을 익혀야 했다.” 안전과 지속성을 위해 되돌려주고 보호하고 풍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338)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존중하며 다른 생물종, 심지어 비생물 자연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공간에서 인간을 생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에콰도르와 페루 사이에 사는 아추아족에게는 인간과 구별되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339) 정글의 동식물은 영혼을 지니며 인간으로 분류된다. 모든 생물과 경의나 상호 존중, 연결과 유대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이다. 비인간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말레이반도 열대우림의 취옹족 또한 “공동체가 인간을 넘어서 식물·동물·강·숲을 포괄”한다. 그들은 “집합적으로 우리 사람이라고 부"른다. “모든 존재가 동일한 도덕의식에 의해 움직인다고 간주"하고, 서로에게 윤리적 책임을 지닌다.(341)  이들에 따르면 “자연을 자원으로 치부하고 착취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불가해”한 것이다.(343) 이는 “평형과 균형의 문제"이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의 관계는 “추출이 아니라 교환"이어야 한다. 줄 수 있는 이상 취하지 않고, 생태계의 재생 한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들어야 하고, 공감해야 하고, 대화해야 한다.”(344) 이처럼 인간은 생태적 윤리를 필요로 한다.  그레이엄 하비에 따르면 ‘애니미즘’은 “세계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되, 그 중 일부만 사람이고, 생명은 언제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물과 식물, 강과 산까지도 객체가 아닌 스스로 권리를 가진 주체로 접근"하는 것이다.(346) 이러한 관점에서는 “모든 존재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들로, 자신만의 지식 형태로 상호작용하고 반응한다". 하지만 우리 경제체제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의 체계적 착취에 의존"하며, 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렇듯 애니미즘은 근본적으로 생태적이다.(347)  자연주의와 탈성장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도그마화 된 철학적 접근이다. 인간의 구분과 관계 없이 인간은의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 속하여 자연에 의존하여 생존한다. 물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독자적인 발현적 속성을 가질 수 있고, 그에 따라 인간의 독특한 특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물리학/화학/생물학) 법칙의 구조적 제한 안에서 그러한 것이다. SF영화에서처럼 지금 당장 지구밖의 생존 가능한 별을 찾아 이주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지구 안에서 지구의 조건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사고 방식을 버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비인간 자연 전체와 공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탈성장'을 그 방향으로 정 할 수 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하는 탄소중립/탄소제로 또한 '탈성장'이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장'을 포기하지 않으며 추진되는 탄소중립은 대개 자본주의의 이윤의 녹색정당화, 그린패싱으로 드러나고 있는 듯 하다.  익숙한 질문에 다시금 직면해야만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생태 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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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개인으로부터 사회로
기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개인으로부터 사회로   기후위기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문제라는 인식이 전면화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기후위기를 심화하는 발걸음은 여전히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광범위한 지구적 인식의 확산, 탄소 배출의 실질적인 저지, 그리고 지속가능한 대안 체제 마련이 필요하다. 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각자가 기후위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 하나의 큰 문제이다. 이 글은 기후위기의 극복을 위해 개인들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맑스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이 그 자체로 완벽한 의지를 가지는 주체인 것은 아니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태어나기 이전에 형성된 사회구조들(국가, 제도 등)과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규정되고 형성된다는 의미다.  인간은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문화 속에서 각기 다른 다양한 경험과 만남들 속에서 공통성과 차이들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이다. 개인은 사회적 관계들의 영향을 받아들이며 개인성을 끊임없이 재형성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제한적인 자율의지를 가진다. 생각이 같으면서도 다르게 형성되는 개인들이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에 억압적일 수 있는 사회구조의 작동방식을 함께 사회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함께’ 더 나은 사회구조로의 변형을 위한 실천을 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어떤면에서 각 개인들의 의사소통의 가능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대화와 소통 그리고 토론과 논의, 논쟁 등을 바탕으로 하는 결정의 문제, 쟁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체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개인의 자율의지가 무시되고, 개인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각자 파편화되어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개인과 사회의 행복,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개인과 사회의 실천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히고, 연결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위와 같이 인간과 사회의 관계만을 고려하는 견해는 자연, 환경, 생태계를 동시에 다루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지배적인 세계관에 따라 인간이 자연과 독립되어 존재하며, 자연은 객체로서 인간 주체에 의한 정복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 혹은 사회의 이익을 위해 벌어지는 과도한 생산은 자연ㆍ환경ㆍ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기후위기로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때문에 사고의 지평을 더욱 넓힐 필요가 있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자연 또한 분리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비롯하여 진화를 거쳐온 자연의 일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회는 ‘특수한’ 자연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인간=사회=자연’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자는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만큼 (인간에 의해 인식된) 자연은 ‘사회적’이다. 조합과 배치, 구성이 다를 뿐 자연과 같은 물질들로 이루어진 인간과 그러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는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을 위해 자연을 파괴해 온 것이 자연 그 자체에, 그리고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환경이란 ‘생물을 둘러싸고 밀접한 관계에서 영향을 미치는 자연적ㆍ사회적 조건과 상황’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경을 보전한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 그리고 이와 상호작용하는 자연의 ‘관계’를 보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생태계를 ‘어느 비유기적 환경 안에 사는 생물들(인간, 동물, 식물 등)과 그 생물들을 제어하는 제반 요인을 포함한 복합체계’라고 한다면, 환경을 보전한다는 것은 ‘관계’을 좀더 중시하는 표현으로 ‘생태의 보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생태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상호작용하며, 기후위기는 그 모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자연과 인간 모두를 위해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을 위해 함께 힘을 모으는‘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 ‘사회적 실천’은 무수히 많은 개인들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개인적 실천들이 모여 사회적 실천을 이루고, 그러한 실천들이 조직의 차원, 그리고 제도의 차원으로 유기적으로 연결 될 때, 기후위기를 실질적으로 극복해낼 가능성이 열린다. 개인의 실천만으로는 공허한 자기 만족이 되기 쉽고, 개인없는 사회적 실천은 사회적 실천의 시도는 권위적인 강요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실천의 차원으로 내려와 보고자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천들을 직접 할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 하고, 분리수거를 일상화 해야 한다. 친환경 먹거리를 이용하고 에너지를 절약하는 등의 개인인 실천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비건을 지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실천들만으로 거대한 기업이나 국가들에 의해 발생하는 더욱 근본적일지도 모르는 문제들까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윤이 지상목적인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화와 난개발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후위기를 심화 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수정할 사회적 실천을 필요로 한다. 대중의 기후위기직접행동, 시민사회단체의 환경운동, 시민사회와 정치인들에 의한 환경보호 관련 제도화 등이 사회적 실천의 중요한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들의 사회적 인식 및 실천과 연결되지 않으면 형성되기 어렵다. 형성되었더라도 고립되어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만약 개인적으로 기후위기 문제에 대해 인식했다면, 개인적인 실천에만 멈출 것이 아니라, 환경단체에 후원하거나 직접 참여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후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을 지지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비관적이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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