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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하고 심난한 청년정책
지난 6월 4일, TV조선 특별프로그램으로 '2023 대한민국 청년정책 공모전'이 방영되었다. 40초짜리 짧은 클립영상에서 눈에 띄었던 장면은 '실망스럽습니다. 생각이 아니라 상상 같은데요' 라고 말하는 심사위원들,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한 청년', '기뻐하는 청년들'이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뒤늦게 유튜브에서 방송을 찾아봤다. "소울메이트의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정책 발표가 끝난 뒤 진행자가 심사위원의 점수를 확인하기 전에 하는 멘트다. 심사위원들이 매긴 점수는 악수하는 모양의 아이콘으로 표시한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다!'라는 의미를 아주 잘 표현했다. 중앙부처가 같이 만든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연출을 맡은 PD의 마음대로 작업을 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이 방송의 발주처가 청년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해석하는지 잘 느낄 수 있는 방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3 대한민국 청년정책 공모전’은 국무조정실과 청년재단이 3월 1일부터 21일까지 접수를 받았고, 712건의 제안이 접수되어 총 2,000명 이상의 청년(3명이 1팀)이 공모전에 참여했다. 추후 총 3차에 걸친 심사를 통한 최종 과제를 선정, 전문가 특강 및 부처 정책담당자 멘토링 후 2차 심사를 거쳐 최종 심사가 방영되었다.(보도자료) 사실 2022년에도 '서울 청년정책 콘테스트'라는 이름으로 정책 오디션이 진행되었고, 그 이전부터 청년정책을 공모전 형식으로 제안 받는 사업은 늘 있어왔다. 시혜적인 관점으로 청년을 바라보는 청년정책이나 단기간 공모전 형식으로 청년정책을 만들어내는 일이 이번 정부에 새롭게 등장한 것도 아니다. 공모전 하나만 가지고 전체를 비판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이러한 방식으로 청년을 호명하면서도, 청년 세대 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청년정책을 강화하지 않는 것에는 의문이 든다. 한겨례 공동기획 기사 [윤석열 정부 1년 ③불평등 청년예산]윤석열 정부 청년예산, 저소득층 몫 줄이고 중산층은 늘렸다연봉 2800, 적금 두 달도 버겁더라…목돈은 중산층 청년 몫공공분양 목돈 들고, 공공임대 줄어…‘노크’ 못하는 저소득층중소기업 청년 16만명 받던 교통비 지원 올스톱 정부의 의지는 말이 아니라, 정책에 실제로 투여하는 예산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청년정책의 결정 권한을 가진 이들은 누구에게 악수를 건내고 있는걸까. 정부가 국정 과제로 제시한 390개 청년정책을 분석한 한겨례 공동기획 기사에서 "청년정책도 빈익빈 부익부인 것 같다"는 한 인터뷰이의 말에 크게 공감이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청년 시기를 안정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청년의 삶에 필요한 기반을 만드는 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심란한 마음으로 방송을 보러 왔다가, 심난한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청년담론 세미나(1) - 정책설계 관점으로 정의하는 청년
안녕하세요? 시민36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청년’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 청년도 있고 아닌 분도 있을 텐데요. 저는 많은 청년들과 함께 활동하는 현장에 있다 보니 청년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가끔 저에게 ‘요즘 청년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저도 궁금 하더라구요. 먹고사는 게 분명 어렵긴 한데,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들여다볼 엄두가 안 났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 혼란을 헤쳐보자는 의지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청년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 함께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청년을 찾았나 지난 2022년 대선 즈음부터인가요. 어느 순간부터 청년 정치, 청년 정책, 청년 고용, 청년 불안 등 대부분의 사회문제 앞에 ‘청년’이 붙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청년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공정’ 이었는데요 (요즈음의 청년 키워드는 ‘불안과 고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 사회가 드디어  이런 문제가 더 이상 청년 개인의 것이 아님을 깨달은 거 같습니다. ‘노력을 더 많이 하라’는 낡은 언어로는 청년세대를 어르고 달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걸까요. 청년세대의 불안과 불평등이 점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청년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과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2022년 대선 선거 시기에 맞춰 본격적으로 청년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본격적으로 2022년 대선 공방에서 거대 정당들은 각자 청년정치인들을 영입하고, 정확히 정 반대의 전략으로 전쟁을 치뤘지요. 이 대결 구도에 많은 담론과 가치가 희생됐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희생은 ‘젠더와 불평등문제의 본질’ 입니다. 이대남, 이대녀 프레임으로 ‘젠더 폭력’은 ‘젠더 갈등’이 되었고, 인권을 바라보는 관점과 불평등 문제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거대하고도 공허한 외침에 휩쓸렸습니다. 대선시기에  기성 정치인들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활약했던 청년 정치인들이 대선이후 정치권에서 배제되고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이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청년’ 정의하기 서두가 길었지만 요지는, 청년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만큼 정치권에서 청년문제 해결을 위해 이런저런 전략 보고서들을 발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22년 경제인문사회연구소에서 청년정책의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과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주관 ‘청년정책의 패러다임과 전략과제 연구. 2022) 청년의 정의, 청년정책 평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 등을 제안하는 보고서인데요.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나누고 싶어서 이번 글을 준비해 봤습니다. 우선 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보고서에서는 청년을 네 가지 유형으로 정의합니다. 사전적 정의, 사회과학적 정의, 법적 정의, 그리고 청년의 사회경제적 의미입니다.  사전적 정의는 말 그대로 청년의 국어사전 풀이입니다. 한자 그대로 ‘젊은 나이’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청년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1898년 도쿄 유학생 잡지입니다. 1989년 ‘청년애국회’ 사건 이후에 청년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했고 1903년 YMCA(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강준만, 2008년) 1920년부터 문화운동의 주역으로 청년을 부각시키는 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청년은 ‘새로움’, ‘신문명 건설’의 이미지로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성세대와 그들의 가치관과의 단절이 청년 정의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청년은 연령적 정의가 아닌 사회적 맥락에서 정의해야 한다는 함의를 갖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시작된 문화적, 역사적 차원이 아닌 사회과학적 차원으로 청년을 정의하는 흐름은 서구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청년을 성인으로의 이행(transition to adulthood) 과정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즉 청년은 ‘이행의 과정 속에서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닭으로 비유하자면 병아리와 닭 그 사이. 푸르스름한 털갈이하는 어중간한 닭으로 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어떤 지점에서 어딘가로 ‘이행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독립’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로부터 경제적, 물리적 자립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관점으로 청년을 생각한다면 청년의 연령이 유동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독립/자립이 늦어지고 있는 시기니까요. 법적 정의로서의 청년은 심플합니다. 2020년에 시행된 청년기본법에 따르면, 청년은 19세 이상 34세 이하인 사람입니다. 정책을 적용할 때 연령에 따라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등 분명한 기준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가장 간편한 연령에 따른 법적 정의를 채택하지요. (국가법령정보센터 청년기본법) 그러나 이렇게 연령에 따른 일괄적인 청년 정의는 다양한 청년의 삶과 모습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했듯, 청년 이행과정이 늘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독립 준비가 안됐는데 35세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청년정책을 적용받지 못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지요.  청년의 사회경제적 의미로서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 결이 있습니다. 생산과 소비 주체, 혁신의 주체, 부양의 주체, 정치적 효용의 주체, 인구학적 효용의 주체입니다. 사회·경제·정치 측면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서 소비·생산, 인구부양, 정치혁신 등 다양한 역할의  주체로서 청년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어쩐지 어깨가 무겁네요.)  보고서에서 정의하는 청년 외에도 마케팅적 관점으로의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MZ’인데요. 어쩌면 ‘청년’보다 더 익숙한 ‘MZ’라는 호칭은 청년층을 타게팅한, 콘텐츠 시장에서의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입니다. 이 호칭이 청년을 호명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부정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면을 극대화하여 청년 전체에게 덧씌우는 방법으로 결국 ‘자기주장이 (말도 안되게) 강하고, 힘든 일은 맡지 않으려는’ 이미지로 굳힌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행하는 청년, 표류하는 청년정책 다양한 청년의 정의를 이해하고 나니 저 스스로를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청년입니다.) ‘나는 이행기를 거치고 있는 병아리와 닭 사이의 존재구나.’ 이러한 자기 정의로 스스로의 위치와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 새로운 의문이 들었습니다. 생애 주기의 궤적 속, 어딘가로 이행하고 있는 청년이여. 우리는 ‘어디로’ 이행하는 중인가요? 청년의 이행은 주로 부모로부터의 물리적,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노동하는 삶으로의 입문이 됩니다.  또 사회에서 중요하게 부여하는 가치 중 하나는 ‘결혼과 출산’이지요. 그렇기에 청년 정책에는 주거, 일자리, 그 다음으로 결혼장려 정책 비중이 가장 높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청년정책중 ‘출산장려정책’ 만큼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 이야기할 순 없으니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이미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다 시피, 청년 이후의 삶의 모습은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년정책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보고서에서는 전반적으로 청년의 이행기에 필요한 물적, 경제적 지원 정책을 강조합니다. 실효성있는 지원을 위해 이행기에 나타나는 청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파악하고 그변화하는 모습에 빠르게 정책 지원을 맞추는 것이 핵심임을 역설합니다.  이 외에도 청년의 다양한 삶의 반영하기 위해 각종 간담회, 연구, 토론회 등의 활동들이 이뤄지고 있는데요. 저는 해당 연구 보고서들을 부지런히 팔로우 할 예정이랍니다. 이놈의 청년 정책 담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같이 지켜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음 글을 준비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글의 주제는 ‘갓생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이 글은 청년활동가들과 진행하는 세미나에 활용하는 ‘발제문’에 내용을 추가한 글입니다.  *청년 담론 세미나를 진행하는 시기동안 릴레이 형식으로 원고를 개시할 예정입니다.
왜 자꾸 청년들에게 이름을 지어줄까: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을 보며
일본 경제를 이야기할 때 “잃어버린 20년(失われた20年)”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원래는 1980년대의 멕시코 경제를 이야기할 때 처음 사용했던 용어지만, 지금은 일본 경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면 그 누구도 멕시코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더 나아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우리에겐 가수 설운도가 불렀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로 시작하는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주제곡 제목으로 유명한 그 말이 지금 일본 경제에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잃어버린 40년”을 향해 갈 것이냐 아니냐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버블 경제 붕괴의 원인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기 청년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억총중류(一億総中流, 이치오쿠소-츄-류-) 1970년, 일본 인구는 1억을 돌파했고, 한국의 정계나 방송계에서 “사천만 국민”, “오천만 국민”이라는 말을 하듯이 이 시기부터 일본의 각종 방송에서는 “일억 일본인”, “일억 이천 만 일본인”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인기 가수 고 히로미(郷ひろみ)가 발표한 <2억 4천 만의 눈동자(2億4千万の瞳)>라는 노래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 경제가 발전하고 어마어마한 호황을 누리면서 일본 국민 대다수가 계급적으로 중류층 정도의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등장했다. 이것이 바로 “일억총중류(一億総中流)”다. “일억총중류”라는 말에는 일본 국민들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적고, 대다수의 국민이 높은 수준의 소비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들어있다. 실제로 이 시기 일본의 지역간 경제 격차가 그 전에 비해 축소되는 경향은 있지만, 이런 말이 유행하고, 이런 말이 강박적으로 사용되면서 일본 사회에선 ‘일본 국민 사이에는 경제적 격차가 없거나 적고 극소수의 부유층과 빈곤층을 제외하면 모두가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일종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버블경제의 붕괴는 경제의 불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신화가 허구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비정규직의 증가 일본 사회에서는 버블이 꺼진 1990년대 이후 20대 청년들의 고용이 불안정해졌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N년 동안을 취직빙하기(就職氷河期, 슈-쇼쿠 효-가키)라 부르기도 한다. 고용 시장이 얼어붙었다는 것이다.  청년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대체한 것은 고용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비정규직의 증가였다. 일본에는 정규직이라는 말은 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고 아르바이트, 계약직 사원, 파견 근무 등으로 쪼개져 있다. 일본 총무성에서 조사한 <고용형태별 고용자수> 통계를 보면 1988년 2월 전체 고용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18.2%였지만, 그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나 1990년에는 20.2%, 2000년에는 26.0%, 2003년에는 30.4%를 기록했고, 2019년에는 38.2%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 이후에는 다소 줄어 2020년에는 37.1%, 2021년에는 36.7%, 2022년에는 36.9%를 기록했다. 경기 불황 속에서 일본 정부는 기업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고용 유연화에 관한 법을 제정하며 정규직 축소를 부추겼다. 청년 세대의 빈곤과 절망, 격차 문제,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었다. 또, 여기엔 젠더 문제도 빠질 수 없다. 1990년 2월, 남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8.8%이지만 여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38.1%였다. 2000년의 경우, 남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11.7%지만 여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46.4%다. 비정규직 비율이 최고치를 찍었던 2019년의 경우 남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22.8%지만 여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56.0%였다. 2022년의 경우 남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22.2%지만, 여성 취업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53.4%였다. (이상 労働政策研究・研修機構)  격차(格差, 카쿠사)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주 언급되기 시작한 단어는 바로 격차(格差)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양극화’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데, 특히 2006년에는 한 해 동안 유행했던 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랭킹을 매기는 신어/유행어 대상(新語・流行語大賞)에서 탑10 안에 들어가기도 했다. 사실 일억총중류라는 말이 유행하던 일본 경제의 호황기에도 격차 문제를 지적하는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는 존재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격차라는 말이 수면 위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버블경제 붕괴의 시작점이라고 지적하는 바로 그 시점이다. 1988년 정부가 발표한 『국민생활백서(国民生活白書)』에 (아주 오랜만에) 격차라는 말이 등장했고, 그해 11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사설 제목으로 「격차사회여도 괜찮은가(『格差社会』でいいのか)」라는 말을 제시한 것이 격차라는 용어가 일본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상징하는 말로 등장한 첫 사례라고 알려져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승리자 그룹(勝ち組, 카치구미)과 패배자 그룹(負け組)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2004년에는 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弘, 1957~)가 『희망격차사회(希望格差社会)』라는 책을 쓰면서 일본에서 “격차”라는 이름을 단 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야마다는 “패배자 그룹의 절망감이 일본을 찢어발긴다(負け組の絶望感が日本を引き裂く)”라는 자극적인 부제목을 단 이 책에서 더 이상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라는 것을 느낀 패배자 그룹이 늘어나면서 직업, 교육, 나아가 가족 구성까지 불안정해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일본 사회는 이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계급과 절망만을 가지는 계급으로 나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의 저서 『희망격차사회(希望格差社会)』.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한 그룹과 대학에 진학한 그룹의 삶의 격차를 직업, 교육, 가정의 측면에서 비교 분석한 책이다. 이 책 이후 '~~격차'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야마다가 이 책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학력의 차이(대학에 진학했는가 아닌가)가 이후의 인생 전반을 결정짓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사례 제시를 통해 보여주면서 희망에도 격차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언뜻 들으면 꽤 수긍이 가는 내용이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다. 이런 격차가 과거엔 없었는가? 야마다가 어떤 의도에서 이 책을 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경제의 불황으로 인한 청년 세대의 괴로움을 고발하는 이야기들은 이후 가난과 격차 문제를 청년 세대만의 문제로 가져가는 식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학교 폭력 문제가 대두되고 암기 중심 교육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경험과 사고력을 중시하는 교육이 대두되었다. 이런 교육을 유토리교육(ゆとり教育)이라 하고, 이런 교육을 받은 세대인 80년대생 이후 출생자를 유토리 세대라고 한다. 일본 경제의 번영기를 제대로 맛보지 못한 세대들, 80년 후반에 중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었던 세대와 그 이후 세대를 유토리 세대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도 1987년생 이후 출생자를 사토리세대(さとり世代)라고 한다. 사토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딱히 물욕도 없고 연애에도 관심이 없는 모습이 마치 깨달은 사람들 같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의 학습량이 다시 증가하면서 탈-유토리세대(脱ゆとり世帯)라는 말도 등장했다. 버블 붕괴 이후의 일본 사회는 계속해서 청년 세대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  사회적/역사적 경험이 다르다면 세대에 따른 특징이 없기도 힘들 것이다. 세대론이 얼마나 유효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반적인 사회경험이나 사회적 경향성을 특정 세대에게 부여하고 이름을 지으며 교묘히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일본 사회의 청년 네이밍을 보며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88만원 세대 이후 한국의 청년 담론에 대해서도 복잡한 마음이 든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도 잘 모르겠다. 괴로운 것도 청년, 고쳐야 하는 것도 청년? 일본의 경우에는 노동조합의 역사가 길고, 오랜 기간 경제 호황이 이어진 덕(?)에 노동조합이 실제 기득권화 된 부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일본 청년들 중에는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용유연화를 추진한 기업과 정부에 분노하는 사람도 있고, 노조와 부모 세대를 기득권 집단으로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증오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각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세대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속박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소위 치유/힐링의 유행이 이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붐처럼 만들어졌던,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골 마을(산촌, 어촌)에서 편안한 차림의 젊은이들과 그들이 있는 풍경만 예쁘게 담는 일본영화들은 이런 유행에 편승한 작품들이다. (이런 영화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건 사실이니까...) 한국은 어떨까? 누군가는 청년 스스로 주거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 혹은 대안을 모색하고 시도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주식과 코인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며 일론 머스크를 찬양하고 자신을 계발해야 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청년들이 불쌍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렇게 아파야 청춘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청년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아서 이 모양이라고 말한다. 그 전에 청년은 또 뭘까? 어떤 사람은 청년은 허구라고 하는데, 또 한쪽에서는 뭐만 하면 MZ를 운운한다. 86이라 불리는 세대에 대학생만 있는 게 아니듯이, 청년도 가난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은 아주 옛날부터 가난했다. IMF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원래 가난했으니까! 지금은 월세집에 살고 있다. 나는 빚도 있다. 프리랜서 노동자인 나는, 직장에  다닐 때 얻었던 수입을 얻으려면 그때보다 더 많은 노동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딱히 결혼할 상대도 없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성소수자인 나는 애초에 결혼할 권리도 없다. 하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마트에 갈 걱정, 병원에 갈 걱정도 지방 사람에 비해 덜할 것이다. 여성들에 비해선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나는 안전 문제에 무감각한 편일 것이다. 대학 교육도 받았고 유학까지 갔다왔으니 누군가가 보기엔 내가 여유 있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처한 입장이야 다르겠지만 30대라는 나이 때문에, 9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고 200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사실, 나와 비슷한 정치적 경험을 하고 같은 방송을 보고 같은 음악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그렇게까지 몸서리 쳐가며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 감정은 뭘까. 단순한 추억의 집합일 뿐일까?  각자가 느끼는 감정은 다 다를 수 밖에 없지만, 어딘가에선 그 감정이 모여서 크게 혹은 작게 분출되기도 한다. 그 감정의 집합은 다양하다. 크고 작은 감정의 집합에서 분출하는 주장은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이다. 그 정치성과 윤리성(무엇을 문제시 하는가)을 세세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오로지 나이로만 띡 묶어버리는 이름 짓기-n포세대, 이대남, 90년대생이온다, MZ-는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실패한 분석이다. 세대론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대론이 없다고 하는 말에도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의 세대론은 실패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계와 지식계의 실패다. 
청년정치, 당사자 운동을 넘어 대안적 사회 전환의 정치로
‘청년정치’에서 ‘청년’이 강조되는 것이 청년의 ‘당사자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암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는 기존의 공론의 영역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도록 해야 한다는 자발적인 주체성의 발현으로 등장한다. 이는 전문가 엘리트에 의한 대의가 충분치 않다는 조건과 관련된다. 대표적인 예로 청년당사자운동에서 청년유니온은 제도정치, 그리고 노동자를 대의하는 민주노총에서조차 청년불안정노동을 대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피자집 30분 배달제 폐지, 커피전문점 주휴수당 지급, 편의점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등 청년노동과 관련된 이슈들을 제기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뒀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다거나 당사자가 객관적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식의 과잉된 당사자중심주의가 아니라면, 당사자의 목소리는 중요하다. 정치의 영역에서 당사자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다. 당사자는 자신이 처한 문제의 사회구조적 위치성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날것으로든 심화된 인식으로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거나 비판적인 지식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권력의 강고함,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당사자에 대한 특성, 사회구조적 위치성 등에 대해서 비당사자들이 이야기를 할 수 없거나 지지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성이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사자들을 대상화하는 것이고 동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청년팔이) 반면 당사자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자신만의 고정된 인식을 객관적 진리라고 말한다면 당사자라고 호명된 개인들의 내부에서의 차이와 다른 경험들과 의견들에 대한 무시와 배제 속에서 특정 개인, 특정 집단의 과잉대표와 권위주의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모여 공동의 인식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당사자들의 문제의식(특수성)이 더 나은 사회로의 전환의 중요한 일부임(보편성)을 설득하여 비당사자들의 지지,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열린 당사자성을 전제로 사회구조적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당사자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공동의 인식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는 '당사자 정치'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청년정치는 청년을 이용하는 정치는 아니며, 청년을 위한 정치이다. 청년을 위한 정치이긴 하지만 청년만을 위한 정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청년에 의한 정치를 포함해야만 한다. 청년에 의한 정치는 단순히 연령 차원이나 단순히 양적인 차원의 의미여서도 곤란한다. 청년정치는 청년에 의한 정치이되 청년들의 임파워먼트를 위한 정치여야 한다. 청년정치는 청년 자신들의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하되,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보편적인 문제의 일부로 위치시켜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청년만이 아닌 모두를 위해 더 나은 한국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여야 한다.
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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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자살: 희망 없이 절망하는 자들의 죽음. 배제당하거나 착취당하거나.
청년의 자살: 희망 없이 절망하는 자들의 죽음. 배제당하거나 착취당하거나.   “‘청년 노조’ 같은 저항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봉건시대의 부르주아나 산업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그런 건 없어. 우리에게 사회의 X같음을 고발할 방법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뿐이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바로 그 직후의 자살이어야만 해.” 소설 <표백>에서 혁명, 변혁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이념 없이 원자화되어서, 실패는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표백세대’로 명명된 청년들 중 한 명이 했음직한 말을 재구성해 본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걸까? 일단 현대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 청년들이 피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출발하려 한다.   몇 년째 2,30대 젊은 층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2011년 기준으로 20대 사망자 중 40% 이상이 자살로 죽었고, 이는 2위 운수사고(15%), 3위 암(10%)를 합친 것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20대의 7.5%가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심지어 최근 경남에서의 조사에서는 10명 중 3명이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아는 ‘진리’처럼 되버렸지만 OECD 국가들 중 1위이다. “일정한 집단군의 자살행렬”이 “사회가 처한 재생산의 위기와 삶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김명희, 2012)이라면, 청년이 흔히 공동체(그렇게 부를만한 뭔가가 있다면!)의 ‘미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청년의 자살은 사회의 위기의 핵심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의 죽음은 사회의 위기이고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통계청 2010년 분석에 따르면 자살 충동 및 이유는 1위 경제적 어려움 30%, 2위 외로움과 고독, 3위 직장문제, 4위 가정불화이다. 청년의 자살 관련 기사들에서 제시하는 자살의 원인들을 단순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위기(로 인한 어려움), 높은 등록금과 그로 인한 학자금 대출, 생활고, 아르바이트, 취업 스트레스, 우울증.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원인들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경제위기는 가장 사회의 기초에 근접한 일반적으로 구조적인 조건이라면, 등록금, 학자금 대출, 아르바이트, 실업은 경제위기와 높은 연관이 있는 한국사회의 청년들의 특수한 제도적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고는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고 표현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이러한 조건들로 인해 나타나거나 강화되는 개인들의 심리의 차원에서의 문제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구조적 조건들 하에서는 안정된 일자리로의 취업이나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성공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낙담과 좌절, 죄책감, 불안을 높이며 결국 우울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계점으로의 도달로서의 절망의 표현이 자살인 셈이다. “더 이상 희망도 꿈도 없어. 용서해. 차라리 살아있는 고통보다 죽는 것이 편할 것 같아.” 여러 명이서 함께 동반자살한 청년들 중 한 명이 유서에 남긴 말이다.   흔히 이루어지는 사회구조 분석을 간략하게 서술해보겠다. 급격한 경제적 변동이 중요한 요인이며 높은 실업률과 비정규직 증가는 현 시대의 경제 위기로 인한 결과이면서 자살률을 높이는 조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1997년 IMF사태 이후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청년층의 자살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즉 추상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경제구조가 자살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청년세대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강화로 인해 더욱 공고화된다. 직업, 보수 등 물질이 행복의 척도가 되고, 무한경쟁/적자생존 논리가 전면화 됨으로 인해 현 시대의 청년은 경쟁에서의 승리와 자아실현을 동일시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청년백수나 비정규직은 패배자, 즉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히게 된다. 경제위기의 사회적 위험에 처했을 때 벗어날 수 있 대안은 부재한다. 그것은 한낱 개인의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안의 부재에 대한 ‘인식’은 자살의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뒤르켐식으로 재구성하면 산업사회의 시장의 무정부성, 즉 시장실패로 인한 적절한 도덕적 규제가 부재하는 아노미적 상황으로 보고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 늘어난다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기적 자살은 “집합적 활동의 결합에 따른 의미 상실”로써 통합이 불충분하여 인간이 존재 근거를 찾지 못하는 것이며,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의 열망에 대한 규제의 결함”으로써 사회 통제의 부재에서 발생한다(김명희, 2012). 이러한 통찰이 뒤르켐이 근대 초기 자유방임주의의 모순을 포착한 것이라 본다면 현대의 신자유주의 또한 일정정도 공통점을 지닌다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자화된 개인들의 연대-없음은 아노미 상황이라는 식의 단순한 등식은 뭔가 께름칙하다.   청년이라는 관점에서 청년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더 파헤쳐 보자. 한국사회 청년들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핵심이 사회적 성공으로서의 번듯한 직장으로의 ‘취업’이라는 점에서 이를 기준으로 하여 청년들이 어떻게 서열화 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청년이 성인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수능으로 상징되는 무한경쟁 교육 시스템에서 또래 청(소)년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혹은 패배하여 대학을 기준으로 그 틀 안에서 서열화 된다. sky-인서울대학교-지방국립대-지잡대-전문대-고졸 따위의 기준들. 대학에 가서 스펙으로 상징되는 무한경쟁 시스템에서 또래 청년들과의 경쟁에서 승리 혹은 패배하여 직장을 기준으로 서열화 된다. 백수-취업준비생-알바-비정규직-정규직-대기업 정규직 따위의 기준들. 이러한 기준들은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청년들의 현실적 서열화를 표현해주고 있다. 서열화의 최하층에 위치하게 되면 대부분 삶의 재생산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서의 서열 기준의 최상층에 위치하더라도 만족하기 어렵다. 인간은 끝없는 욕망을 가진 존재라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희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 청년이라는 집단 전체가 배제된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이라는 정체성이 처해진 조건으로 인해 상당수의 청년들이 청년이란 이유로 배제된 자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고, 이는 연대의 부재, 혹은 연대의 파열을 의미한다. 세분화된 서열화는 이러한 파편화의 경향을 강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보자.   *청년 1: 2011년 12월 12일 공무원 시험에 여러번 떨어진 취업준비생이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 *청년 2: 2011년 12월 11일 항공사 승무원 입사 실패 후 옷 매장 차렸으나 경영이 잘 되지 않아 자살 *청년 3: 2013년 초 120만원 월급 받는 직장을 구함으로 인해 기초생활수급자격을 잃어 알콜 중독증 어머니 치료비와 고등학생 동생 학비를 지원 받지 못하게 되고 고령의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가족이 살던 국민임대아파트에서도 쫓겨나게 되자 자살을 시도했다. 이러한 상황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all or nothing’ 식의 복지제도의 한계 *청년 4: 2013년 편의점주 1월 15일 자살. 1997년 IMF 때 부도 맞은 아버지가 1억의 빚을 남기고 떠남. 아르바이트. 삼성중공업 비정규직 1년, 삼성중공업 협력업체 계약직 2년, 정리해고 때 퇴사. 취업 안 됨. 아파트 담보로 편의점 점주 됨. 집 담보로 3000만원 빌려 시작. 본사 납입금, 일매출 송금제, 계약 해지 통보 등의 압박 속에서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자살  *청년 5: 2010년 1월 대기업 삼성전자에 들어갔다. 근로계약서에는 8시간 3교대, 주 5일 근무로 되어있었지만 실제로는 12~14시간 근무, 2교대였고 설비 이상시 20페이지 리포트 써내라는 지시도 있었다. 피부염이 생겼고 우울증이 진단을 받았다. 2011년 1월 결국 기숙사에서 자살. 며칠전 여직원 자살. 자살이 더 있었으나 쉬쉬했다는 증언 있음. *청년 6: 2013년 3월 19일 자살. 37세 울산시 중구 9급 사회복지직 공무원은 빠르면 밤 11시, 늦으면 새벽 2시에 퇴근했고 주말에도 나와 일했다. 최근 2주간은 아내와 자녀와 같이 지내지 못하고 본가에서 출퇴근. 1월 31일 용인에서도 29세 사회복지직 공무원 자살, 2월 26일 성남에서 32세 사회복지직 공무원 자살. “두 명의 자살을 약하고 못나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진심을 보여주고 싶다”고 유서에 씀. 청년 1과 2는 취업에 실패했다. 청년 3은 취업했으나 그것으로 인해 제도가 그의 삶의 재생산을 불가능하도록 조건지었다. 청년 4는 불안정한 취업에서 밀려나 재진입에 실패하고 편의점 점주가 되나 불공정한 룰에 고통 받다가 자살했다. 청년 5와 6은 각각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으로 취업했으나 살인적인 노동 강도 속에서 고통 받다가 자살했다. 청년 1~6의 배치는 대체로 앞서의 서열화에 조응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서열의 층위에서 청년들의 자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취업이라는 기준에서 서열화에 양적/질적 차이가 있더라도 ‘공통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점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은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되고 있다. 그렇다고 청년들을 자살로 이끄는 원인으로서의 ‘공통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청년들의 자살은 어떻게 유형화 할 수 있는가?   뒤르켐은 자살의 성질이 아닌 원인을 통해 자살을 분류하였다. 이들을 자살로 몬 것은 뒤르켐에 따르면 강제적이고 외재적인 어떤 사회적 사실일 것이다. 이들을 자살로 몬 사회구조적 원인은 ‘강제된 분업’이다. 강제된 분업이란 “적절한 도덕적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들 사이의 계약관계는 강압적 권력의 강요나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김명희, 2012). 뒤르켐은 강제된 분업에 의한 자살을 ‘숙명론적 자살’이라 한다. 뒤르켐은 이를 “지나친 규제로 인한 자살이며, 강압적인 규율에 의해서 미래가 무자비하게 제한되고, 욕망이 난폭하게 제압되는 사람들에 의한 자살”로 정의하고 “육체적 및 정신적 압제로 인한 모든 자살”이 이에 속한다고 언급했다. 김명희는 뒤르켐이 아노미적 분업에 의한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만을 근대사회의 지배적 자살로 여긴 것을 비판하며 과도한 규제가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내재하고 사회의 아노미와 함께 작동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숙명론적 자살은 착취적 구조와 제도적 규범의 억압에 대해 종속된 정신적 상태, 즉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의 박탈과 관련이 있다. 또한 숙명론적 자살은 전쟁이나 고문 등 불가항력적 규율로의 속박 상태와 물리적 강제를 수반하지 않는 ‘경제적 강제’로 구분할 수 있다. 김명희는 이러한 관점에서 군대에서의 자살, 쌍용차 노동자의 자살, 매향리와 강정마을 주민의 자살, 가족동반자살 등, 한국사회에서의 일련의 자살들을 정치를 전쟁하듯 운영하는 ‘전쟁정치’에 대한 대응이나 비규제적 시장화의 폭력성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숙명론적 자살인 것으로 분석한다(김명희, 2012).   이러한 관점에서 청년들의 자살은 ‘경제적 강제’로 인한 숙명론적 자살, 비규제적 시장화의 폭력성에 의한 숙명론적 자살로 위치지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학벌과 직업적 서열화들의 고착화와 그 틀로의 진입 자체의 어려움의 고착화가 강제된 분업이고 경제적 강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청년들에게는 이중의 어려움이 있다. 진입 자체의 어려움과 내부의 피할 수 없는 서열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배제되는 자들과 서열화 되어 착취당하는 자들의 차이일 따름이다. 이중의 치킨 게임인 셈이다. 또한 이는 청년들의 자살의 원인이 청년들의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는 경제사회구조와 청년들과 관련된 특정 제도들 즉 과도한 등록금, 비정규직, 실업의 구조화 등에 있다는 앞서의 설명과도 일관된다. 흔히 지적되는 우울증은 그것의 개인적 표현일 뿐이며, 그것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자살의 책임을 개인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 위기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문제가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청년들을 둘러싸고 ‘강제된 분업’, 잘못된 규제와 규율을 바꾸어 적절한 도덕적 통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뒤르켐이 상정했던 초기 산업사회/자본주의의 도덕적 통제의 부재가 많은 변화를 거쳐 오면서 현대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통제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적절한’ 도덕적 통제의 규제 대신 거짓 자유의 고착화로 인한 비자유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제의 고착화 내지는 전면화로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의 청년들에게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은 내면화되어 전면화 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자본주의 국가 자체가 강제된 분업을 필연적으로 필요로 하고, 심지어 그것을 핵심적인 동학으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함의한다. 경제적 자유를 내세우며 국가의 최소화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강력한 국가에 대한 의존은 많이 알려져 있는 바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를 위해 많은 것을 노동 유연화, 민영화 등등의 이름으로 특정한 분업 형태를 강제한다. 한국 사회의 청년들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형태의 시민의 죽음, 사회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다시 청년에게로 돌아 가보자.   한국사회의 청년에게 ‘취업’은 삶 (재)생산에 핵심적 요소일 수밖에 없다. 청년이 ‘배제’되었다거나, ‘자리 없다’고 할 때 그 기준은 일단 취업과 관련된다. 누군가의 언급처럼 노인을 ‘자리 없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면, 노인은 자리를 이미 차지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실감’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청년은 자리를 차지해야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삶 그 자체’의 차원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자리는 부족하고 있는 자리들도 앉으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부실한 것들이 많다. 많은 청년들의 삶은 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것의 극단적인 표현이 ‘자살’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청년들은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그리고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 청년 6의 유언 중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나는 인간이기에, 뜨거운 피와 따뜻한 삶이 도는 하나의 인격체이기에 최소한의 존중과 대우를 원하는 것이다. 공공조직의 제일 말단에서 온갖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 하는 일개 부속품으로서 하루하루를 견딘다는 건 머리 일곱 개 달린 괴물과의 사투보다 더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