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홍범도는 빨갱이?

202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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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 연구자. 일어/중국어 교육 및 번역. => 돈 되는 일은 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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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950년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으면 안 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金昌龍, 1920~1956). 호는 옥도(玉島), 창씨개명 당시의 이름은 타마시마 소오류우(玉島昌龍).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1940년 일본 관동군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이후 일본의 첩보원이 된 그는 1943년부터 2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국, 조선의 비밀 항일 단체 50여 개를 적발해 검거했다.

일본이 패전한 후 고향으로 도망쳤다 체포된 그는 당시 이북에 진주하던 북한군과 소련군에게 두 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모두 탈출했고, 1946년에 결국 월남했다. 이남에서 국군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그는 소련군 장교를 찾아내 추방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이후 남로당 색출, 여순사건 진압에도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 남로당 출신의 소령 박정희(朴正熙)를 검거해 심문한 것도 바로 김창룡이다. (박정희는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에 의해 곧 풀려난다.)

1949년 인민해방군 사건, 1950년 김수임 사건에서도 늘 그는 큰 활약을 했다. 한국전쟁에서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이승만의 반대파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숙청하는 공을 세워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는데, 군과 정부의 조직을 무시하고 이승만에게 직통 보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을 정도였다. 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거만하게 행동하던 그는 결국 1956년 1월 30일, 대령 허태영, 대령 이진영, 소령 안정수, 중위 허병익 등에 의해 암살을 당해 사망했다.

김창룡이 사망하자 이승만은 직접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갈 정도였고,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치러졌다. 이승만은 그를 중장으로 추서했고, 그의 장례식이 있던 2월 3일, 이승만은 그 날 하루동안 전군에 조기를 게양하게 하고 모든 군인들의 음주와 가무를 금지했다. 김창룡은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묘주명(묘비 앞면에 쓰는 글)은 이승만이 직접 썼고, 그의 송덕비에 세겨진 묘갈명은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병도(李丙燾, 1896~1989)가 썼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 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슬퍼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까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단기 4280년. 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 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 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란 중에는 군검 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 오열(五列),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 5천 명, 전시 방첩의 특수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 대통령 암살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 남도부 등의 대남유격대사건, 88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길이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 11월 23일 향년은 37세로서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민족문제연구소.<심판받을 김창룡 중장의 송공비>, 신현복)

김창룡과 함께 숙군 작업을 했던 김안일(金安一, 1917~2014)은 김창룡에 대해 반공 이념보다 개인적인 복수심을 위해 일했다고 평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김창룡이 이승만에게 내민 공산주의 활동의 증거는 그저 ‘내가 안다’, ‘내 친구라서 안다’ 수준이었고 이승만은 그런 그를 늘 믿었다고 한다. 김해진의 증언에 따르면 공산당과 관련이 있으면 부모형제랑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도 일단 체포하였고 죽기 직전 무렵에는 ‘고추가 빨갛다’, ‘여자들의 치마가 빨간 색이다’ 같은 것에 집착하면서 이런 것을 공산당과 엮으려고 해 웃지못할 해프닝이 많이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3권』, 인물과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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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위 ‘자유주의 진영’이라 불렸던 나라들에서 이런 식의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1950년대 초중반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이 미국 공화당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1957)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미키마우스의 아버지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도 조지프 매카시의 공산당 색출에 적극 동조했고,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일개 무명배우에 지나지 않았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도 미국 배우 조합을 만들어 영화계의 공산당 색출에 핏대를 올렸다.

매카시는 공산주의자 느낌이 나는 인물이 있으면 그를 청문회에 세우고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며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면 그 다음날 언론은 청문회에 선 사람을 공산주의자라고 확정해 보도하는 식이었다.

(치엔취에썬,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여기에는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치엔쒸에썬(錢學森전학삼, 1911~2009) 박사도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JPL연구소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당시 우주공학, 로켓엔진기술의 최우수 인재 중 하나라 불리던 사람이었다. 2차 대전 중에는 직접 독일로 가서 독일의 우수한 과학자들을 포섭해 미국으로 데려오는 공을 세우기도 했고, 우주비행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50년, 중국에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 몰려 FBI의 감시를 받았던 그를 구명하기 위해 동료 과학자들이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당시 정치권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결국 그는 1955년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으로 간 치엔은 5년 동안 공교육을 정비해 기초학문을 탄탄히 하고, 그 다음 5년 동안은 대학생,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응용학문을 가르치고, 그 다음 5년 동안 실무적인 준비를 마치면 중국도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는 계획을 마오쩌둥에게 제시했고 마오는 그를 전폭 지원했다. 지금 중국이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핵폭탄을 소유하게 된 것은 모두 치엔의 공로인데 어쩌면 매카시의 공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훗날 미중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하고 미중간 교류가 시작되었을 때 미국에서 치엔을 초청해 우주공학기술에 대한 연구교류를 하려고 했다. 그 때 치엔은 사과부터 하라고 일갈하고 단 한번도 미국에 가지도, 미국 연구자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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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봉오동에서의 홍범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그를 낳고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고 부친도 그가 아홉 살일 때 세상을 떠났다. 머슴살이를 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했다. 홍범도는 신계사 상좌 지담(止潭) 밑에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구니였던 부인 이옥구(이옥녀라고도 함)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환속하여 이옥구의 친정이 있는 함경남도 북청으로 가 살림을 차렸다.

사냥꾼 생활을 하며 명포수로 그 고장에서 이름을 날리던 홍범도의 인생이 바뀐 것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다.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왕비를 처참하게 살해하고 조선의 정치를 장악해 단발령 등을 시행해 조선 사람 개개인의 삶을 장악하려 했을 때 홍범도도 포수 열 네 명과 의병을 조직했다.

을미의병이 흐지부지된 후에는 홍범도와 14인의 포수들도 흐지부지 해산을 한 것 같다. 그러다가 1907년 정미조약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자 그도 수 백 명의 사람들을 모아 다시 거병했다. 어린 시절부터 머슴 생활을 했고 커서는 포수로 사냥을 해 먹고 살았던 홍범도는 기골이 크고 근육질이면서 몸이 매우 민첩했다고 한다.

이때 일본군은 홍범도의 부인 이옥구를 붙잡아 홍범도를 회유하려 했다. 조선군 제3순사대 대장 임재덕(林在德)은 일진회 회원이었는데 이옥구를 붙잡아 간 게 바로 그였다. 이옥구가 말을 듣지 않자 일본군은 이옥구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고 이옥구는 직접 혀를 자르며 회유를 거부했다. 결국 말을 못 하게 된 이옥구는 ‘삼수갑산’이라 하는 갑산의 감옥에 이송되었다가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났다. 1908년 4월의 일이다.

같은 해 6월에는 17세였던 장남 홍양순도 함남 정평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홍범도는 차남 홍용환을 데리고 연해주로 건너갔는데 이곳에서 홍용환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홍범도는 한동안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가 1922년에 이인복과 재혼하였다.

이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가 비교적 많이 알고 있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고 일본의 토벌군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간 이야기나 자유시 참변(1921) 같은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홍범도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난 (아마도) 유일한 독립군이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가 크즐오르다 고려 극장에서 수위장으로 일하다가 1942년 즈음에 사망했다. 명확한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1943년설과 1942년설이 있다.

옛날에 공자(孔子)를 두고 ‘안 되는 줄 알면서 하는 놈(是知其不可而爲之者)‘이라 비웃은 이가 있었으나 본시 사람의 길이란 천하를 바라보며 설사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아도 옳은 길이면 그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맹자(孟子) 또한 이르기를 넓은 곳에 거하며 바른 자리에 서서 세상을 위한 큰 도를 행함에(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뜻을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그 길을 가는데(得志與民由之 不得之獨行大道) 부유함과 귀한 자리도 그를 방탕하게 만들지 못하고, 가난과 천함도 그를 흔들지 못하고, 위세와 무력도 그를 굽히게 만들 수 없다 하였으니(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이 말은 곧 홍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세상에 그 누가 조선의 몇 사람이 제국 일본을 상대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는가? 비록 자신이 소 아홉 마리 중에 털 하나에 불과한 작은 존재라 생각할지라도 옳은 길이기에 그 길을 갔을 뿐이다.

일본이 패망하고 일본의 식민지들이 하나하나 독립을 할 때, 홍 장군 같은 이가 없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나 조선의 후손들이 이 시대 조선을 바라보며 조선인들은 독립을 원치 않았구나, 독립할 마음이 전혀 없었구나 했을 것이다. 그게 지금 한반도의 두 국가가 독립운동을 한 열사, 지사들에게 진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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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식. 사진출처 대한민국 국회)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1958~, 육사 37기. 비례대표)이 작년 정기국회 국정감사 중에 뜬금없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85년 대위로 경기도 북부에 있는 8사단에서 재직할 때, 훈련 중 발사된 박격포에 맞아 숨진 이등병을 두고 불발탄을 밟고 죽었다고 보고해 사건을 조작하고 책임을 회피한 사람이다. 2022년 대통령 소속 진상규명위원회가 유가족의 신청을 받고 이 사실을 밝혔는데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차마 진상규명위에는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하고 이를 보도한 오마이뉴스 측에 대고 명예훼손이니 손해배상이니 운운하며 화풀이를 한 바 있는 비겁한 사람이며 (중앙일보.2023.08.28.) 천안함전우회 안종민 회장이 SNS에서 이를 지적하자 계정을 차단하고 마치 온 세상이 국회 국방위 간사인 자신을 음해한다는 식으로 말하며 모략이라 말한 바 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그는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안보낙관론과 지도층의 무능이 얼마나 안보에 위협이 되는지 이야기한 바 있다. 안보에 철저한 사람인 양 행동하지만 정작 실상은 강약약강 그 자체인 신 아무개는 중요한 책임은 회피하는 비겁한 태도를 지닌 사람으로 안보를 운운할 자격이 없는 자인데 그것도 모자라 북진통일을 운운하니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모두가 평화를 노래할 때 '북진통일' 준비하라. 인사이트.2020.06.21.)

자기 휘하의 병사 하나도 제대로 책임을 못 지고 권력에 아부하는 비겁자 주제에 나랏일을 입에 담는 것도 가소로운 일인데, 목숨 바쳐 제국주의와 싸운 투사, 열사를 감히 모욕하는 것은 무슨 주제도 모르는 짓이란 말인가!

이런 이들이 북진통일을 외치는 까닭을 나는 안다. 자신들은 절대 전장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총알받이로 앞장서서 싸울 것이 아니면 비겁한 소인배 주제에 젊은이들 목숨을 자기 손 안의 바둑돌인양 떠들지 말자.

그는 성범죄 피해를 호소하며 잼버리 퇴영을 진행한 한국 스카우트 전북 연맹 단원들을 두고 반 대한민국 카르텔을 운운한 바 있는데(신원식 페이스북) 참으로 가소로운 망동망언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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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신원식 같은 인물이 망언을 펼치고 현재의 한국 정부와 여당은 이런 인물에게 동조하여 유난을 떨고 흉상을 옮기냐 마냐 하는가? 이들에겐 사실 역사도 전통도 없다. 이들이 숭상하는 것은 오로지 , 그것 뿐이다. 그 힘을 가지고 싶어하고 그 힘을 가진 사람을 너무나 사랑한다. 목적도 이유도 없는 맹목적인 사랑은 현실감각을 잃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실 정치에 있어서 보수힘에 대한 숭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권력이든 재력이든 무력이든 완력이든, 현실 정치에서 보수를 칭하는 이들은 힘을 숭상하고 자신들 스스로를 권력 예비 보유자 쯤으로 생각한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같은 강대국이 아니면 대부분의 사회에 존재하는 (현실 정치 상의) 보수가 강대국을 숭모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특히나 식민지나 침략을 경험한 사회의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자신들을 침략하고 점령한 집단에 대한 숭상을 보인다. 왜 한국 보수가 성조기를 흔들고 다니는가? 사실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층이 강대국 미국/일본/중국을 찬양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지만 한국 보수 처럼 성조기를 들고 나타나는 집단은 정말 드물긴 하다.)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사랑해 마지 않던 일본,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배워야 한다고 외치던 일본! 미국이 사랑해 마지 않는 일본! 대통령이 좋아하는 모리소바, 우동, 장어덮밥의 나라 일본! 오무라이스가 맛있는 나라 일본!

그런 일본에 감히 덤빈 독립군이 그들의 눈에 얼마나 거슬렸을까! 게다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목하는 전정권(前政權) 씨가 유해를 모셔온 홍범도 장군이니 얼마나 지우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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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이야기한 것이 다소 극단적인 예시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과거의 이른바 반공이라는 것은 다 이런 식이었다. ‘공산당 같다’, ‘~~에서 태어났다’, ‘정부 정책에 자꾸 의심을 품는다’ 등등.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도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니 자기들 입맛에 안 맞으면 뻑하면 공산당을 찾는다.

과거 몇 십 년 동안, 그들이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가짜 간첩을 얼마나 만들어 냈는지는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김기춘이 날조하여 고문하고 살해한 재일교포 간첩단, 김아람 양 돌잔치에 모인 일가 친지와 이웃, 친구들을 아람회라는 반정부 간첩단으로 만들어 체포하고 고문했던 전두환 정권 등등등.

인터넷에 김창룡을 검색하면 조갑제(趙甲濟) 등등이 쓴 김창룡 찬양이 넘실거리고, 김창룡의 두 딸(김미경, 김미영)은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면서 자기 부친이 일본군에서 활약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했다. 그가 박정희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그가 간첩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겠냐면서! 이따위 글과 책이 세상에 나와도 아무 문제가 없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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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해석의 문제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역사란 각자 자기 꼴리는 대로 지껄여도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근거, 즉 사실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해석은 그냥 믿음이다. 이것은 무당의 공수를 믿는 것보다 저열한 것이다. 무당이 하는 말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면 그만이지만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 조각을 모아서 이것이 참역사요 진실이라고 우기면 세상에 끼치는 해악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우리 모두 확인하고 있다. 언제까지 믿음을 지식이라고 우길 것인가?

또, 공산주의자면 조선 독립의 공이 사라지는가?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박정희는 빨갱이인가? 소련과 수교하고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려고 처음 시도한 노태우는 빨갱이인가? 해군 잠수함에 장군의 이름을 붙인 박근혜 정권과 그 시절 해군은 빨갱이 정권 좌파 군대인가?

실리도 없고 이념도 없고 윤리도덕도 없는 홍범도 장군 모욕 주기는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김창룡의 후예들이 홍범도 장군을 모욕하는 것이 자유라면, 그런 자유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이슈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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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남 비회원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역사인데 신원식이라는 한 인물의 막말이 왜 이렇게 국가를 시끄럽게 하는가 모든 영상, 방송, 뉴스를 봐도 홍범도장군은 당연히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뉴스화가 되어야하는가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라고 생각합니다. 잼버리의 결과는 뉴스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어쨋든지 모든 국민이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역사공부를 하였고 홍범도장군은 당연히 독립운동가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홍범도장군의 과거의 인생사가 현재의 볼모가 될 수는 없습니다. 홍범도장군은 다른 독립운동가의 방패막이가 되었습니다. 홍범도장군의 과거의 인생사를 문제시 된다면 다른 독립운동가도 이와 마찬가지로 폄훼 될 수 있습니다. 홍범도장군은 당연히 독립운동가임을 절대 사수해야 합니다.
백형주 비회원

분명한건 일본군을 없애고 대한독립을 위해서 두아들과 부인을 잃은 독립투사다.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905/121018487/1 

신원식 의원이 차기 국방부 장관에 내정됐다는 언론 기사가 나왔네요. 역사적 맥락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공산주의' 네 글자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인물이 국방부 장관이 되어도 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2023년에도 빨갱이라는 딱지를 척하고 붙이고 밀어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읽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글 정독했습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었더니 어려울거라 생각했던 내용들이 그림 그려지듯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현재 벌어지는 많은 일들의 처음 시작 무렵에 있었던 인물들의 상관관계를 보면서, 그들의 졸렬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whgkals77 명백한 무익/부도덕/반사회성 행동과 타협은 없습니다

정치세력간의 긴밀한 협의 방법도 필요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