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대만 이야기(1) 대만의 옛날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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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 연구자. 일어/중국어 교육 및 번역. => 돈 되는 일은 다 함

2024년은 선거의 해이고, 그 포문을 연 첫 선거가 바로 대만 총통 선거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대만의 역사

대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기 이후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오지(吳志) 오주전(吳主傳)」에 보면 오나라 왕 손권이 황룡 2년(230) 정월에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시켜 바다 건너의 섬 이주(夷洲)와 단주(亶洲)에 가게 했는데 이 두 사람이 이주에 살던 사람 수천 명을 강제로 끌고 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온 이주와 단주가 대만이라고 하기도 한다.

대만이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 안에 서술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 때다. 이때는 지금의 펑후제도(澎湖諸島)와 대만 일대를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보았다.

본격적으로 대만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명나라 때의 일이다.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만이 왜구의 근거지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또 이 즈음은 유럽의 대항해시대에 해당한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거쳐 동남아시아까지 들어왔다가 대만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만에 붙인 별명이 바로 아름다운 섬, 포르모사(Formosa)다.


아름다운 섬

16세기 말,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은 전국시대를 마무리짓는 시기였고 중국도 대제국 명나라가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그 사이에서 조선은 소위 양란이라 불리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역시 이 틈을 타 명나라가 갖고 있던 펑후제도를 점령하고 1624년부터는 대만 따위엔(大員)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고, 2년뒤에는 스페인도 지롱(基隆)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다. 두 세력이 대만에서 각축을 벌이다가 1642년이 되면 네덜란드가 스페인 세력을 대만에서 완전히 추방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중국 복건성, 광동성 연안의 중국인들을 모집해 대만으로 데리고 가 농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기 대만 원주민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뜻에서 타요우안(Tayoua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지금 타이완의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정성공(鄭成功)

네덜란드가 대만에 요새를 쌓기 시작한 1624년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 하나 태어났다. 중국인 무역상이자 무장집단의 수장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 지금의 나가사키 근처인 히라도(平戸)번의 무사 타가와 시치자에몽(田川七左衛門)의 딸 마츠(まつ)와 하룻밤 정을 쌓고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정성공(鄭成功)이다.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정성공화상)

타가와 마츠는 정성공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중국 복건성으로 길을 떠났다. 머리가 좋았던 정성공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해 생원이 되었고, 당시 이름난 유학자였던 전겸익(錢謙益)의 제자가 되었다.

전겸익은 동림당(東林黨) 소속이었다. 당시 명나라 황실과 정치를 비판하던 재야인사들이 동림서원에 모여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며 하나의 학파이자 정파인 동림학파/동림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양명학을 비판했다.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주자학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 쉽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행을 하여 사사로운 욕망을 줄여나가야 하고(존천리거인욕) 이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천하라는 공적인 영역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양명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곧 하늘의 이치라고 주장하면서(심즉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림당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 그룹은 양명학의 ‘자유에 대한 강조’가 천하를 그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림당은 주자학 중에서도 살짝 특이한 그룹이었는데, 그들은 학문적 목적이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사회적 욕망과 도덕적 수양, 정치적 활동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 속에서 천하의 이치(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유럽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고 농업, 공업 기술의 발전과 경영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는 군주제가 아니라 지방 분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성공은 이 그룹에서 지식인/개인의 강렬한 사회적 의무에 대한 마음가짐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1644년, 농민봉기군의 수장인 이자성(李自成)이 궁궐에 난입해 명나라가 멸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리장성을 지키던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이 소식을 듣고 성문을 그냥 열어버렸고 이로 인해 만주족이 장성을 타고 내려와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때 명나라 지식인들 중 일부는 청나라에 대항하는 군대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정지룡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황족인 주율건(朱聿鍵)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주율건은 정성공의 외모가 수려한 것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겠다, 명나라 황실의 성인 주씨를 하사하겠다 운운했는데 정성공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성공에게는 ‘나라의 성씨를 받은 나으리’라는 뜻의 국성야(國姓爺)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정성공의 영어 별명 중 하나인 콕싱야의 어원이다.

청나라와의 싸움 와중에 아버지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더이상의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정성공은 자신의 부친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며 청나라와 싸웠다. 각각의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청나라의 강력함을 이길 수는 없었던 정성공은 결국 대만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것이 1661년의 일이다.

1661년, 펑후제도를 점령한 정성공은 같은해 3월에 네덜란드가 쌓았던 강력한 요새 질란디아(Zeelandia)를 포위, 1년 남짓 공격한 끝에 네덜란드 세력을 대만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정씨왕조

네덜란드 세력을 타이완에서 완전히 몰아낸 정성공은 대만을 동도(東都)로 개명하고 정씨 왕국을 세웠다.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낸 1662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81년에 사망했고, 그 다음은 정경의 아들 정극상(鄭克塽)이 뒤를 이었는데 정극상은 1683년에 청나라에 항복해버린다. 이를 통해 정씨왕조의 대만통치도 끝이 난다.

정성공 일족의 대만 통치는 20년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대만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 대만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만의 시조이자 개국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화외지지(化外之地)

정씨왕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는 대만에 대만부, 대남현(타이난), 고웅현(까오슝), 가의현(쟈이)를 설치하고 복건성 아래에 편입했다. 하지만 대만은 어디까지나 변방이었다. 청나라 황실에게 있어서 대만은 황제의 교화 바깥의 땅(화외지지化外之地)였고, 대만에 정착한 중국인과 대만 원주민도 교화 바깥의 백성(화외지민化外之民)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중국인들은 끊임없이 대만으로 건너갔고, 19세기가 되면 그 이전에는 사실상 대만섬 전역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이전에는 대만섬 남쪽에 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대만 원주민들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만인이라 불리는 한족 그룹이 만들어졌다. 원주민들도 이렇게 한화된 대만 원주민을 평보족(平埔族), 평지에 사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영국의 탐험가 존 톰슨John Thomson - 1837~1921 - 이 남긴 평부족 여인의 모습.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839년, 아편전쟁이 시작되면서 청나라 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열강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대만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청나라 측에서도 대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하고 1885년, 대만을 복건성에서 분리해 대만성을 만들고 대만을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진다. 여러 신료들은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하건 협상을 벌이건 우리끼리 알아서 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고종이 강력하게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톈진조약의 조선에 청나라가 출병할 경우 일본도 자동출병해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일본군도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청일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결과 역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결국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이 대만 통치를 시작한다.


대만총독부

1895년, 대만에 살던 사람들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대만민주국을 건립했다. 이때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전쟁을 을미전쟁(乙未戰爭)이라 부른다. 하지만 대만민주국은 우리가 예상하듯이 패배하고 말았고, 1896년이 되면 일본이 완전히 대만을 장악하고 통치하기 시작한다.

일본에 대한 대만 내부의 여러 활동은 조선과 꼭 닮아 있다. 친일파도 있고 독립세력도 있으며 이들이 좌우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도 똑 닮았고, 식민지 후기에 황국신민화 정책이 벌어진 것도 똑같다. 한가지 다른 점은 일본이 싫으면 언제든지 대륙으로 넘어가 생활을 하거나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는 한족의 입장과 일본이 싫어도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원주민의 입장, 이 두 가지 입장이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기억했으면 하는 두 가지 무장 투쟁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15년에 벌어진 시라이안(西来庵事件)이다. 이 사건에서 대만인 1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하나는 1930년 원주민 세디크족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인 우서 사건(霧社事件)이다. 한국에는 막연하게 대만이 친일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마치 독립 운동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인터넷 검색만 좀 해봐도 다 알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소위 전문가 딱지를 붙이고 나온 사람들이 너무 성의 없이 떠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시라이얀 사건을 주도한 위칭팡余淸芳의 사진. 일본인들과의 경제적 차별로 인해 벌어진 무장봉기였다.)


(대만 원주민을 학살한 일본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인들의 대만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은 사다크족이 일으킨 무장항쟁인 우서 사건 때의 사진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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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역사를 잘 정리한 책을 누군가 읽고 나서 핵심만 쏙 뽑은 요약본을 읽은 느낌이네요. 읽으면서 몰랐던 내용도 많았는데요. 신기했던 건 대만이 한국과 여러모로 닮아있는 구석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음 편도 바로 읽어봐야겠어요.

대만의 옛날 이야기는 다양한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 문화적인 유산을 담고 있으며, 대만의 다채로운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는 데 많은 흥미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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