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끔찍한 장면은 시민들의 시야 바깥에 놓이도록, 그래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죄책감이나 반성 없이 "이토록 즐길 게 많은" 세상에서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조장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텐데, 그것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작권 논쟁도 논쟁이지만, 사람의 '노력'과 '결실'에 대해 고민이 깊어집니다. 

물론 단지 노력을 쏟아야 하는 '분야'가 달라졌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흠... 

노력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수단인데, 그 노력이 가치가 점점 떨어진다면, 자칫 저작권의 문제 이전에 삶의 의미에 큰 변동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어쩌면 '허무함'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겠달까요....흠.  

'의미'라는 것이 위험해지는 세상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네요. 챗GPT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BCI라니 !

BCI의 대표적인 사례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의 사례를 들어주신 점을 현재 장애학과 장애인들의 투쟁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이른바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으로 대표되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다시 보행할 수 있는 '그때'는 많은 분들의 꿈일 것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BCI같은 기술을(내가 잘 모르고, 또 위험할 수 있는) 선택'해야만'하는 상황에 놓이는 위험은 오직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의 꿈을 가진 하반신 마비 장애인분들에게만 해당되는 위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이 그런 꿈을 단순히 꾸는 것에서 만족하며 보다 잘 갖추어진 장애인 돌봄 제도와 정책을 누리며 자신의 장애와 더불어 사는 일상생활에 머무를지, 아니면 기술의 속도를 돌봄 제도나 정책의 발전이 따라가지 못해 BCI같은 '불안한' 기술을 선택하도록 내몰릴지는 앞으로의 제도와 정책의 발전에 달려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항경이 캠페이너님(링크)께서 ‘역량’ 개념을 소개해주셨는데, 이 역량 개념을 BCI기술의 대척점에 두어야 할까요 ? 그런 고민도 하게 됩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

너무도 노골적으로 노동조합을 찍어누르는 현재의 모습을 생각하며 읽으니 여러 감정이 교차합니다.

한편, “법이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민들이 끊임없이 토론하며 함께 최선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쟁의행위의 법적 성격, 취지와 이념, 정당선 판단 기준 등은 오늘날의 노사 갈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더더욱 시민들이 활발히 이야기해야만 하는 주제입니다.”라는 말씀을, 징징이 캠페이너님의 [Yes/No만 정답인가요?-섹스의 진부화된 의사소통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다시 구성하기]에서 논의된 ‘인간 감정의 정동’과 연결지어 법리 바깥에서 노동자와 노동권을 얘기할 필요도 더욱 강하게 와닿는 것 같습니다.

장애인분들의 지하철 시위라던가(파업과 시위는 같은 법리적 원리를 갖는가요?) 노동조합의 파업 등, 어떤 권력 앞에서 단체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들의 울분과 같은 감정이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유통되고 공유되는지 고민해 볼 필요를 느꼈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캠페인즈에서 BDSM이란 단어를 읽을 날이 올 줄이야 ! 공론장의 주제들이 한층 더 다양해졌다는 것을 체감하네요. 

저 역시 "예스"와 "노"로 딱딱 떨어지는 부분은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최근 '감정'이라든가 '정동'과 같은 것에 대해 연구하는 책이 꽤 나오고 있는 것 같던데, 딱딱 분절되는 이성적인 것도 중요하겠지만 감정이나 정동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누스바움과 센... 특히 누스바움의 저작들은 하나같이 제목이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내용이 어려워 쉽게 시도하지 못하고는 했는데, 좋은 책을 추천받을 수 있어 기쁩니다.

[역량 접근법]의 개념, 그리고 [경제성장만이 유일의 가치가 아니라는 점]은 한국 사회의 자살 현상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제가 문제 삼는 자살 현상은 빈곤이나 폭력 등에 내몰린 끝에 도망치듯 자살하는 형태가 아닌, 단지 삶이 지겹고 더 이상 굳이 살 이유가 없어 선택하는 자살을 말합니다.

 그런 상태의 자살은 ‘삶의 흥미’ 또는 ‘재미’와 연결해보고 싶은데, 이때 ‘역량’개념이 중요하게 관련될 것 같습니다. 왜냐면 흥미나 재미는 한순간에 체감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적응하고 채택하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재미를 찾아낼 수 있는 역량....이건 좀 아닌가, 아무튼. 그런 걸 고민하게 됩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

마지막 문장처럼, 실제 PC에 대한 일상적 혐오는 밈의 형태로 굉장히 가볍게, 그러나 자동적으로 소비되는 흐름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ㅋ으로 대표되는, 모든 논의와 문제제기를 가벼운 것으로 취급해버리는 현상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씹선비질.

그렇다면,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전략을 이쪽도 모색하는 게 맞는 걸까요 ? ?

+유아 교육 전공의 지인은 돌봄의 수요자로서 아동의 입장을 제시하며,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탁아가 아닌 교육으로서의)보육의 전문성이 과연 아동의 그 섬세한 발달 과정에 맞춰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초래할 엄청난 미래 위험을 지적했다. 참 감사한 지인이다.

동시에 그의 지적 이면에는 국내 보육 전문가들의 일자리 및 노동권 문제가 녹아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느낌.

딱히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임금노동 없이도 기본적 생활을 향유하는 사회로의 급진적 전환-은 너무 이상적인 상상이겠죠...?

AI로 기존의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고용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비자들의 윤리적 소비는 우선 페미니즘이나 비건 이슈 등처럼 어떤 사회적 정의의 실천을 조소하고 비웃는, 이를테면 '씹선비 문화' 또는 '일베 문화'를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기업이 AI를 쓰고자 할 때 기존 노동자에 대한 임금을 유지하는 조건으로만 허용할 것...은 너무 급진적인 상상이려나요 ?

테라초이스의 그것과 함께 또 하나의 가이드가 제시됐군요. 테라초이스의 그것이 주로 소비자보다는 광고업체나 마케팅팀을 위한 것에 좀 더 가깝다고 한다면 그린이지팀의 이것은 좀 더 한국 소비자 친화형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유용하게 사용하겠습니다.

한국의 불신뢰의 심각성, 그리고 여야로 나뉜 거대양당을 생각했을 때, 특정 소비재의 전과정에서의 단계별 친환경 인증 및 평가를 어느 주체가 하는 게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에게 와닿을지도 중요해보입니다.
와닿는다는 건, 신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누가 인증했느냐에 따라 개인이 친환경 소비 흐름에 동참할지 보이콧할지도 갈리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단어입니다.

디지털 격차로 인한 정보의 비대칭은 불편함을 넘어 불평등한 문제가 되었다는 부분에서 정말 고민이 깊어지네요. 제 주변인도 자기 친척분의 업무를 도와주느라 고생인데, 멀리서 보면 충분히 금방 해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되는 것을 어렵게, 그리고 복잡하게 하고 있더라고요. 디지털 격차가 세대 차이를 넘어 확장되는 것도 두렵습니다. 예컨대, 점점 기술이 어려워져 차라리 그런 역량을 습득해내고 싶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빈곤계층에서 더 나오게 되는 건 아닐지. (그런데 이 역량을 스스로 습득해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는 '도덕적 해이'일까요?)

우울증 갤러리를 폐쇄하는건 답이 아니에요. 기타

이른바 '인터넷 우울러'들은 디시 우울증 갤러리 이전에도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트위터, 인스타그램, 네이버 블로그 등의 sns에서 '자기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수색하고는 했습니다. 현실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지 못해 sns서 모이는 건데, "네 우울은 모르겠고 여기는 위험하니 폐쇄함!" 식의 태도로 폐쇄하고 끝내는 건 공공이 이 현상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보여주기에만 급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폐쇄했는데도 또 다른 곳에서 모이면 그땐 '괜히' 모였다가 변을 당한 니들이 잘못 아냐?"라는 명분도 가능케 하고요.

저는 각 sns에서 보이는 분위기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울증을 앓는 인터넷 우울러들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노' 말투를 쓰며 디시의 분위기를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트위터 우울러들의 경우엔 차라리 '점잖'타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페미니즘 등의 '진보적인' 이슈에도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단지 '우울'의 존재를 고려할 게 아니라, 누가 우울증 갤러리에 모이고 누구는 트위터에 모이는가? 이 부분을 고민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탄소중립이라는 이슈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전무했는데, 이해의 시작점으로 삼기 괜찮은 글인 것 같습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행복에 관한 동운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서사적 자아>라는 개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풀어 설명드릴 정도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문득 그 개념을 동운님의 행복론과 연결지어서, "그렇다면 개인은 자기 인생의 서사를 기획하고 실천해나갈 때 주변의 어떤 것들을 활용하는가- 반대로 주변은(국가와 사회, 이웃 등) 어떤 제공을 준비해야 하는가(능동적으로 제공해야 하는가, 수동적으로 제공할 준비만 해 두면 되는가)" 같은 고민을 이어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는 질문과 함께 학생과 교사의 역할이 다르며, 애초 인권이란 양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별개인 학생 인권과 교권을 마치 둘이 나눠 갖는 것처럼 말하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습니다."

조영선 활동가님의 이 말씀에 동의합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 속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는 방법에는 비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뭉치기 위한 동력, 그러니까, 내가 남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으면 남도 나의 권리에 관심이 없을 거라는 상호신뢰와 기대가 가해자로부터 피해자와 비가해자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뢰와 기대는 권리라는 것을 교사vs학생의 구도에서 서로 뺏고 뺏기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주고받는 것으로 인식할 때에야 형성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아가 교사와 학생 간의 연계를 넘어, 교사를 향한 학부모, 교감, 교장의 부당한 요구나 학생을 향한 학부모의 부당한 침해 등의 예방 또는 대항, 학교라는 기관의 주변부 직원들(청소하시는 분이나 경비원 등)의 권리도 다같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걸 지역사회차원의 보호로 확장시키는 건 조심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성소수자는 여러분 주변에도 있습니다."를 그만두는 것]의 의미를 조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억압받고, 억압 받아왔으며, 앞으로도 억압 받을 것으로 전망되는 이들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구호가 현실사회에서 그들을 향한 억압이나 차별이 없어지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랄까요 ? 

물론 작성해주신 글의 취지와는 빗겨가는 논지의 고민이지만 말입니다. 

문득 들은 고민이라 주장이 부드러운 댓글을 쓰지는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