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아이들을 보낸 지 벌써 10년입니다. 당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며 고시공부를 전전하는 25세 대학생이었던 제게 4월 16일은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노라 울면서 다짐하게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3년상을 치르듯 너희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찾겠노라 버둥댔고 2017년 4월, 의미는커녕 스스로의 삶 하나 건사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세월호 기억공간이 보이는 광화문 카페에 홀로 앉아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보낸 지 10년이 되었을 때에는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영정 앞에 내어놓고 싶었는데, 매서운 세월의 바람 앞에 속절없이 풍화되어 온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10년이 지난 지금, 그 간의 마음을 매듭짓고 새롭게 다짐을 기록하고자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1. 2014년 4월 16일 : 우리 모두의 실패  돈과 물질, 권력과 허세로부터 인간과 생명, 자유와 평등을 향한 새 기풍을 진작하지 않는다면 팽목의 통곡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다. 팽목은 이미 한국의 압축판이고, 세월호는 대한민국호의 다른 이름이다.-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박명림 교수 한겨레 기고문 중 사실 그럴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위기상황인지, 얼마나 붕괴의 조짐들이 많이 보이는지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10대 시절 중고등학교를 보내며 교육구조가 얼마나 처참하고 그 구조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신음하는지를 보아왔고, 대학에 들어온 이후 여러 학문과 글,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삶의 경험들을 통해 무언가 잘못된 거 같고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은 사회의 단면들을 바라보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감각하는대로 정말 사회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으레 어른들이 이야기하듯 아직 10대의 순수함을 벗어나지 못한 청년의 시절에 바라보는 순진한 시선이었는지 스스로조차 잘 알지 못한 채.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외치기엔 자신이 없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나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건의 당일에는 그저 당황했던 거 같아요. 뉴스를 뒤덮은 수많은 속보들과 서로 맞지 않는 이야기들. ‘설마…’ 라는 말줄임표로 끝나던 생각이 시간이 흘러 ‘정말?’ 이라는 놀람의 물음표로 바뀌던 시간들. 하루이틀이 지나며 우려했던 그 일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이내 무너져내렸던 시간들. 긴급히 생겨난 여러 모임들에서 함께 이야기하며 울던 시간들. 점차 드러나는 여러 정황과 실체들… 제가 무너져 내렸던 자리는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구나’라는 자리였어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실려 있었던 화물들, 짐을 조금이라도 더 싣기 위해 줄여버렸던 평형수,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내고는 제일 먼저 도망쳐버린 리더십들, 침몰 당시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위기상황체계, 서로 다른 정보가 뒤섞이며 엇갈리는 언론,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지만 그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 어느 누가 책임자이고 죄인이라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모든 프로세스 중에 현실과의 타협이 있었고 좀 더 이득을 취하고자 저지른 꼼수가 있었고 별 일 없을 거라며 눈 감던 관행이 있었고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안일함이 있었어요. 그것들이 만분의 일의 확률, 십만분의 일의 확률로 연결되었을 때에 배가 침몰하고 사람들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들을 사회와 공동체가 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으니깐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타협과 꼼수와 관행과 안일함이 사실 일상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어요. 운명의 주사위가 다른 숫자를 내보였다면 그것은 2014년 4월 16일의 진도 앞바다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사실 이미,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었고 죽음의 주사위를 던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낸 대가를 그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치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를 그리도 무너지게 했어요. 그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깨닫고 모르지 않았었는데. 가시화된 죽음을 목도하고 난 후에야 그것이 진실이었구나, 그리고 그 주사위를 막지 못하고 결국 굴리고 말았구나 라는 사실 앞에서 그들의 죽음에 저의 책임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생각했어요. 나와 우리의 안일함이 모이고 모여 이 주사위를 굴리게 만들어버린 것이니깐요.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10년. 10년 뒤에는 너희 앞에 부끄럽지 않을 나라와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결심이 말이죠. 그렇게 10년이 흘러, 오늘 다시 아이들 앞에서 되묻고 있네요. 정말 우리는 그런 나라와 사회를 만들었을까 하고 말이죠. #2. 2024년 4월 16일 : 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2021년 어느 봄날 저녁, 청와대 앞 광장에서 커다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스텔라데이지호 이등항해사 허재용 씨의 어머니 이영문 씨였다. 그날은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하여 선원들이 실종된 지 4년이 되는 날로, 정부에 2차 심해수색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회에서 이영문 씨가 증언할 차례였다.73세 노모의 울음소리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침묵했고,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세상이 정적 속에 정지한 것 같았다.그때 정적을 깨며 누군가 이영문 씨를 향해 달려갔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을 위한 기도회에 참여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 창현 어머니였다. 그는 이영문 씨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두 엄마가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 <포기할 수 없는 약속>, 416생명안전공원 예배팀 엮음 중 사실 2014년 당시만 해도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너무 컸던 거 같아요. 구하지 못해 미안하고 살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울면서 이야기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이후 2016년에 마주했던 사건들.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건을 지나면서,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의 실체가 점차 가시화되고 알지 못하던 여러 곳에서 사회적 모순이 죽음의 사건으로 공론화되는 것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아직, 배 안에 있구나 라는 사실을 말이죠. 죽음의 주사위는 여전히 굴려지고 있었고, 도처에서 신음과 울부짖음이 터져나오고 있었어요. 사건들이 터져나올 때마다 절망감이 스스로를 뒤덮었습니다. 사실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수 번 아니 수십 번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기회들을 모두 비껴나면서까지 사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은 마치 겹겹이 설치 해둔 창문들을 뚫고 들어오는 추위와 같았어요. 추위를 막고자 설치한 유리창들이 번번히 깨져 있었고, 바람은 그 깨진 유리창들 사이로 뚫고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죠. 추위야 그저 견디면 그만일텐데, 확률의 유리창들을 뚫고 엄습한 사건은 가장 연약한 사람부터 공격해 들어왔어요. 그건 그저 사고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겹겹이 형성한 시스템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였고 멈춘 시스템을 틈타 죽음의 주사위가 굴려지고 있다는 증거였어요. 자연의 위협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고, 사고의 위험을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그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사회의 시스템과 공동체의 규율이 붕괴될 때에 공동체의 가장 약한 사람부터 확률적으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드러난거죠. 하지만 그보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깨진 유리창들로 이루어진 사회 시스템을 보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는 사실이었어요. 그 시스템이라는 것은 비단 정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관여하는 개개인의 직업윤리와 공동체윤리마저도 붕괴된 현실을 살고 있으니깐요. 동시에 그런 윤리를 지키지 않은 개인에게만 탓을 하기에는 직업윤리와 공동체윤리를 지키면서는 도무지 살 수 없도록 설계된 사회였어요. 경쟁에 내몰리고 원칙이 비웃음 당하고 순수함이 순진함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 이 문제들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음이 점차 피부로 와닿아졌어요. 국가의 실책, 제도의 실패 등에 대해서 당연히 이야기하고 바꿔야 할 문제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 점차 깨달아지고 있었죠.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조금은 절망스러운 마음과 체념을 가지고 이번 10주년을 지나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3. 메타노이아metanoia : 마음의 전환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의 전환shift of mind, 즉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그리스인에게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근본적인 전환 또는 변화,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마음의 초월meta을 의미했다.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 전통에서 ‘메타노이아’는 지고의 존재, 즉 신을 직접적으로 알고 깨우친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므로 ‘메타노이아’는 세례 요한 같은 초기 기독교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단어였으리라. 가톨릭 자료에서 ‘메타노이아’는 ‘회개’로 번역된다.- <학습하는 조직>, 피터 센게 지음 중 참사가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이 때에, 이 비극의 연쇄작용을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사회운동이 일어난다고 해서, 한 두 개의 정책이 세워지고 법률이 통과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의 종류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회의 특정 부분, 구조의 어떤 영역에 특이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깔려 있는 우리 스스로의,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무기들을 내려놓아야 할 거 같았어요. 박명림 교수님은 세월호 참사 당시에 기고하신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에서 사회의 숨과 바람과 호흡의 방향, 정신과 영혼의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팽목의 통곡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라 예견하셨던 것 처럼 말이죠. 그러던 중 제가 발견하게 되었던 것은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개념이었어요. <학습하는 조직>이라는 책에서 시스템 사고의 권위자인 피터 센게 교수는 특정 조직이 위대한 팀으로 거듭나면서 조직에 속한 구성원들이 하게 되는 강렬한 경험과, 그 경험이 구성원 각자의 인생과 방향성 자체를 바꾸어놓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리고는 그 경험을 설명하는 단어를 찾던 중 ‘메타노이아’라는, ‘마음의 전환’이라는 단어에서 찾았어요. 사실 이 단어는 종교를 가진 분들이라면 더욱 친숙한, ‘회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단어죠. 종교를 가지지 않던 이가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방향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것이었죠. 이 개념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한국 사회가 참사의 연쇄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한국 사회의 ‘메타노이아’ 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각자가 타협과 꼼수와 관행과 안일함으로부터 원칙과 생명, 공동체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전환하는 것’. 그렇게 각자의 깨진 유리창들을 모두가 보수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만이 더 이상 죽음의 주사위가 구르지 않고 그 죽음의 확률을 함께 힘을 모아 막아내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피터 센게 교수는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메타노이아에 대해 증언하고 있었고 그것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킬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심하게 되었죠. 하지만 전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비단 참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의 하루하루, 순간순간 속에서 원칙보다 편의를, 전체의 순리보다 나 자신 혹은 내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기를 강요받죠. 그러려고 하지 않는 마음조차 무색하게 그로 인해 당장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와 손해가 막심하거든요.설령 누군가가 그러한 마음의 전환을 하기로 결심하더라도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한 1명의 변화는 그 사람의 생존과 그 사람이 속한 조직의 생존을 위협할 뿐이에요. 세상의 룰은 바뀌지 않았지만 홀로 그런 선택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사람들은 도리어 ‘이기적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순진하다’ 혹은 ‘이상적이다’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밖에 없을 거에요. 심지어 모두가 바뀌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 행동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니깐요. 우리는 여러 사건과 이야기 속에서 그 상황들을 지켜보고 왔었죠. 그럼에도 전 사회의 ‘메타노이아’가 아니고서는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던 저로서는 그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씨름했습니다. 조직을 넘어 생태계로 발전된 새로운 운동과 흐름에 대해 역사를 뒤적이기도 하고, 제도와 조직, 문화에 대해 씨름을 하면서 어떤 가능성의 단초들을 찾아나서고자 했어요. 하지만 긴 씨름의 끝에 제가 발견한 것은, 이미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시작되었고 이 질문의 시작이야말로 그 증거였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이었습니다. #4.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사건이 촉발하는 사회의 메타노이아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돌베개>, 장준하 지음 중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이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고(故)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인 <돌베개>에 나오는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선생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 때에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나라를 잃은 조상들과 다르게 우리 세대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그 마음이 척박한 여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과 ‘더 이상 어른들을 닮지 않겠다’는 세월호 세대 아이들의 말이 겹치게 읽혔습니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는 방식을 통해 계속해서 사회의 메타노이아를 경험해 온 나라였다는 사실을 말이죠. 1910년에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으면서 사회 전체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내 일어난 1919년의 3.1운동과 이후 벌어진 독립운동은 모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라를 다시 독립시키겠다는 열망이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일으킨 결과였습니다.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했죠. 그리고 우리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합니다. 다시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었죠. 하지만 이내 1950년 우리는 6.25 전쟁을 경험합니다. 전쟁은 또 다시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리고 광복과 독립의 정신을 계승할 새도 없이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고 맙니다. 기근과 가난 속에 태어난 세대는 전쟁의 충격 위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산업화와 경제개발에 사회 전체가 몰두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19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 사이 1980년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군부독재 속에서의 억압 속에 살던 세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게 되고 1987년 6월 항쟁을 넘어 직선제 개헌을 통해 우리는 민주화를 이루게 되죠.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항상 이전 세대의 실패가 누적되고 축적되다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사건’을 경험하면서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경험해왔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 전체라고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그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회가 경험한 사건이 사회의 ‘메타노이아’를 일으키면서 사회 전체가 그 반작용의 활동에 몰두하게 되는 일들을 다름아닌 우리나라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겪어왔더라구요. 그리고 그 메타노이아를 촉발시킨 사건은 앞선 세대의 모순이 누적되어서 촉발한 비극이었습니다. 경술국치가 그러했고, 6.25전쟁이 그러했으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그러했죠. 그렇기에, 이 모든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기본적으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헌신한 세대들의 발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아이러니이자 일종의 비극인 이유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 자체에 있습니다. ‘못난 조상’이라는 표현 자체에서 우리는 사회 전체에 있어 마음의 전환이 일어났지만 그 전환의 방향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또 다른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는 아이러니를 보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앞선 세대로 하여금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했지만 독립 이후의 혼란과 나라 형성을 제때 하지 못한 아픔이 남았고, 그 아픔을 딛고자 경제성장에 몰두하던 세대는 군부독재를 허용하고 민주화를 놓치면서 국가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됩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하는 결심으로 일어난 세대는 기어이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민주국가를 만들었지만, 세월호 세대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을 그들의 언어로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마주했던 2014년의 참사가 우리 세대의 ‘메타노이아’를 촉발시킨 사건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메타노이아는 안타깝게도, 과거의 역사가 그래왔듯이 이전 세대의 모순이 누적되고 축적되다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 전체의 ‘마음의 전환’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가진 ‘참사의 되풀이를 막기 위한 방법’에 대한 질문 자체조차 세월호 참사로부터 촉발된 제 마음 속의 ‘메타노이아’였던 것이 깨달아지게 된 것이었죠. #5. 상처 입은 세대 :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타자의 비판이 한갓 타자의 부정에 머물러 적극적 자기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이 자기 형성을 통한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공동의 적을 통해 결속된 우리는 그 적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남남으로 흩어지게 되고 지배 권력은 그렇게 원자화된 시민을 끊임없이 상호 경쟁으로 내몲으로써 자신의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된다.(…)다시 그런 봉기가 일어난다 한들, 그것이 단지 독재적인 통치 권력에 대한 부정과 반발에서 촉발된 것이라면,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는 매번 유사한 방식으로 봉기하고 적대적 권력을 타도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온전한 의미에서 나라를 형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김상봉 교수 씀 중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발견했고 우리나라의 현대사 속에서 메타노이아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만,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러한 참사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주요한 원인이 다름아닌 이전 세대의 메타노이아 그 자체라는 것에 있습니다. 경술국치의 참혹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은 이 일을 촉발시킨 일제에 대한 저항과 항거였습니다. 동시에 경제성장을 향한 전국민의 노력도 전쟁의 트라우마를 딛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구요. 민주화운동 또한 국가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참혹함에 대한 충격이 가지는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세대의 모든 노력들, 그리고 모든 메타노이아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들어내는 자양분이 되어주었지만, 그 에너지들 자체가 ‘이전 세대가 가진 모순의 누적으로 치른 대가에 대한 트라우마’의 성격이 강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어느 세대 하나 없이 모두 상처입은 세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상처로 촉발된 마음의 전환은 그 자체로 큰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만한 힘을 보여주지만, 그 힘의 방향이 필연적으로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 혹은 극복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균형 있는 자기형성과 성장을 만들어내기보다, 사회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이전 세대의 모순에 대한 극복에 몰입되는 나머지 또 다른 측면에서의 모순을 눈감게 만들고 맙니다. 그것이 누적되고 축적되다보면 결국 다음 세대에게 트라우마를 안기는 또 다른 참사를 만들어내고 마는 것이죠. 김상봉 교수님은 최근 내신 저서 <영성 없는 진보>에서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에 대해 ‘타자의 부정에서 적극적 자기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현대사가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의 연속이었지만 그 가운데에서 트라우마를 딛고 적극적 자기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또 다시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새롭게 사회 전체에 일어난 마음의 전환을 목도하지만, 그 깊은 곳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한계인 트라우마의 측면 또한 마주하게 됩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우리 세대로 하여금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분노어린 다짐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10년간 경험한 이러한 마음의 전환이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을 넘어 적극적 자기형성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 또한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모순이 축적되어 벌어지는 참사를 넘겨주는 ‘못난 조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6. 비판에서 형성으로 :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낸다는 것 “오로지 대학만 바라보고 공부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세월호를 보면서 어른들과 사회체계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어떤 어른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게 됐다. 한편으론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는 마음, 믿음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런 어른은 되지 않겠다"...세월호 10년, 97년생이 온다” (오마이뉴스 2024.04.16.) 중 97년생의 증언 나라 잃은 아픔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시대정신이 ‘독립운동’이라면, 전쟁으로 일어난 시대정신이 ‘경제성장’이었고, 국가의 폭력 앞에 일어난 시대정신은 ‘민주화’였음을 봅니다. 그런 우리 앞에 세월호가 웅변하고 있는 우리의 시대정신은 어쩌면 ‘주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막연한 신뢰를 바탕으로 앞선 세대, 앞선 리더십, 앞선 이들이 해오던 대로, 하라는 대로 따르던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의 결과를 우리는 보고야 말았으니깐요.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따라야 하는 시스템과 권위와 어른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을 봅니다. 실제로 이 새로운 세대는 분명하게 주체성의 경험들을 축적해가고 있습니다. 맨바닥에서부터 전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그러하고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서로의 필요를 위해 완전히 새롭게 생겨난 청년 단체들이 그러하고, 완전 새로운 판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아티스트들이 그러합니다. 동시에 이전의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직장인들이 그러하고 학생들이 그러합니다. 디지털 전환이 만든 새로운 공간 위에 같은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이 세대는 이전 세대에 의존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기에, 우리가 앞선 세대들이 해왔던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우리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직면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세대는 더 이상 ‘다음 세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지금의 시스템과 지금의 사회에 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변화를 직접 만들어야 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고 제3자인 누구에게, 어른인 누구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세대가 아닙니다. 우리 세대에서 정치인이 나오고 있고 우리가 직접 가정을 꾸리고 공동체를 구성하고, 우리 스스로가 사회를 형성하고 선택하며 동시에 직접 책임지는 자리에 서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믿지 말자“라는 데에서 더 나아가 ”각자의 깨진 유리창을 책임지고 서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라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앞선 세대에 대한 트라우마로 우리 사회가 쌓아온 모든 유산과 축적된 경험을 모두 불신하게 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모순을 만들어내는 선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기획한 세월호 세대에 대한 조사에서 나온 저 증언에 저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있다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세월호가 상처가 아닐 수 없고, 우리 안에 불신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불신을 넘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믿음의 연대를 회복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일상으로 녹아들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합니다. 거창한 정치나 시민운동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의 도움, 배려, 때로는 약자에 대한 도움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리창의 보수이자 치유의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에 다른 선택을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비판이자 대답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선택과 경험을 통해 성장해 나가겠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선택들의 대가 중 일부를 우리의 다음 세대가 치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또한 앞선 세대의 부채를 껴안으면서 이러한 사건 앞에 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앞선 세대의 대가를 치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또한 다음 세대가 어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사회를 이용한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우리는 또 다른 참사를 낳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트라우마에 우리 스스로가 지배되어 우리의 동생들과 자녀들을 해치는 것에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의 주도적인 세대가 되었을 때에 우리의 다음 세대에 대한 고려가 있는 판단이 있어야 하고, 다음 세대를 우리보다 더 나은 세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판단과 선택들, 그리고 책임들이 이루어지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비극의 연쇄고리가 아닌,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사회가 진보하는 선순환의 연쇄고리를 만드는 첫 단추를 꿸 수 있을 것입니다. # 닫으며 : 위대한 세대가 되기를 소망하며 미국에는 ‘가장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세대가 있다. 1901~1927년 태생이다. 이 세대는 청년기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이겨냈고, 1950년대에는 미국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 개념을 널리 알린 〈나 홀로 볼링〉을 썼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질이 왜 갈수록 나빠지는지, 사회적 자본이 왜 갈수록 쪼그라드는지 추적했다. 답은 의외였다. 사회적 자본을 유난히 풍부하게 가졌던 윗세대가 퇴장했기 때문이다. 그게 전쟁을 겪은 세대, 그러니까 위대한 세대였다(퍼트넘은 1910~1940년생까지로 좀 더 넓게 잡는다). 이 세대는 후속 세대보다 공적 토론에 더 관심이 많고, 더 많이 투표하고, 시민적 결사와 공공업무에 더 많이 참여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돕고, 동료 시민들을 더 신뢰한다. 한마디로 더 나은 시민이다.위대한 세대는 가장 가혹한 전쟁의 자식들이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응집력을 극적으로 높이므로, 때로 전쟁은 더 나은 시민을 만드는 용광로다. 퍼트넘은 방대한 데이터를 검토한 후, 결론으로 이렇게 쓴다. “1945년(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다)에 절정에 달했던 국가 통합의 시대정신과 전시(戰時)에 불붙은 애국심이 시민정신을 강화했을 것이다.” 그 힘은 이 세대가 살아 있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만큼 오래갔다. 이들이 주도한 시대에 미국은 최전성기를 달렸다.-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갈림길에 선 한국 편> 천관율 기자 씀 중 천관율 기자님이 코로나 시기에 썼던 기사에서 나온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은 그 또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사로부터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퍼트넘에 따르면 이 메타노이아를 통해 위대한 세대는 공적 토론에 더 관심이 많고 공적 업무에 헌신하고 동료와 연대하는 ‘더 나은 시민’이 되었다고 기술합니다. 물론 이 세대가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앞선 세대의 트라우마까지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저희도 알 수 없고, 현재의 미국을 볼 때에도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대한 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또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를 하게 만듭니다. 사실 이 글에서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을 수 있는 중요한 일로 ‘앞선 세대에 대한 용서’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트라우마조차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세대가 겪은 상처에 대한 용서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느 날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 또한 다음 세대에 대한 가해자가 되어 앞선 세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완전히 우리 안의 상처를 모두 회복한 후에, 상처로 인해 어찌할 수 없었던 지난 세대의 과오를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 세대가 우리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앞선 세대를 용서하고 다음 세대에게 좋은 어른이 되는 세대가 될 수 있다면, 우리 세대로부터 우리 나라의 온전한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우리 또한, 미국조차 온전히 이루지 못한 ‘위대한 세대’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많이 성공했거나 가장 화려한 세대여서가 아니라, 정말 우리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후대 세대에게 롤 모델이 되고 기준이 되는 그런 세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떠나 보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그런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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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ve Research :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연구
0. 들어가기에 앞서 본 발제문은 나이오트가 제안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연구’(Active Research)와 나이오트가 그리는 새로운 연구생태계에 대한 제언 및 스케치입니다. 지면 및 발표시간의 관계상 밑그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Active Research Journal와 나이오트의 활동을 통해 이야기 나눌 예정입니다. 1. 서론 : 왜 사회문제 해결에 연구가 필요한가? "내가 고통스러웠던 건 범죄의 잔혹성을 봐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죄책감과 무력감 때문이었다.”- <나는 텔레그램 n번방에 있었다>, 한겨레 오연서 기자 기고문. Esquire. 2020년 4월 17일 2020년. 경악할만한 사건 앞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을 때에, 본래 패션잡지인 에스콰이어 지에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대해 주요하게 보도했던 한겨레 오연서 기자님의 기고문이 올라왔습니다. 처음 제보를 받은 순간부터 피해자와 긴밀히 연락했던 긴박한 상황들에 대한 소회를 기록한 그 기고문에는 사회문제 해결의 일선에 서 있는 기자를 비롯한 여러 체인지메이커들이 실제 마주할 감정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 감정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력감’이었습니다. 무력감. Helplessness로 번역되는 이 단어에 대해 네이버 지식백과는 ‘영아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 반드시 양육자와 같은 타인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생존과 모든 욕구를 완전히 타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듯이, 거대한 사회문제 앞에서 그것을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고 개개인 한 두 명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알게 될 때에 느끼는 감정. 사실 이 감정은 사회문제 해결에 진심을 가졌던 모두가 한번쯤은 느꼈을, 어쩌면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감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는, 사회문제 앞에서 이러한 무력감을 느끼게 된 것일까요. VUCA :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 현대사회를 나타내는 주요한 용어로 사용되는 VUCA는 급변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줄인 말입니다. 1990년대 미국 육군대학원에서 군사용어로 사용되던 이 단어가 사회 전반에 확대되게 된 데에는 그만큼 사회의 변화가 급격해지면서 국가안보 뿐만 아니라 사회일반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VUCA라는 특성에 대해서는 보통 2가지 축을 가지고 설명하는데요. 하나는 ‘현재의 문제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행동 했을 때에 내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가’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 두 가지 축 앞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우리가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과 그 이상으로 ‘우리의 행동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기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의 실체이지 않을까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이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 ‘연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결국 문제상황에 대한 이해와 나의 행동에 대한 이해 모두 각각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연구가 가지는 선입견 때문인데요. 연구는 ‘현장성이 없고’, ‘느리고’, ‘탁상공론만 반복한다’는 것이죠. 사실 이러한 선입견에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연구의 대부분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그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연구 자체가 추구하는 ‘학문적 엄밀성’으로 인함일텐데요. 과학적 사실에 입각한 지식을 도출하고자 하다보니 연구의 자료를 설정함에 있어 의견이 가라앉고 사실이 확실해진 과거의 자료를 보다 선호하게 되고, 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지금껏 축적되어 온 전문지식을 활용하면서 그 내용이 점점 난해해지기도 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구 없는 사회문제 해결’은 가능한 것일까요? 연구에는 그 자체로 기록과 축적, 사유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구를 하지 않고 사회문제의 해결에 뛰어드는 것은, 마치 전쟁터에서 적에 대한 정보와 지형에 대한 정보, 그리고 아군의 전략전술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눈 앞의 적들만을 상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구를 통해 우리는 앞선 세대의 지식과 연결되고, 또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죠. 결국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현장에서는 “현장의 문제해결에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현상에 맞추어 대응할 수 있는”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연구’는 어떻게 해야 가능할 수 있을까요? 2. Agile Research : 문제해결을 위해 빠르고 민첩하게 연구하기 사실 사회문제의 해결에 앞서 이러한 VUCA에 발빠르게 대처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비즈니스 영역’인데요. 앞서 이야기한 VUCA의 성격이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고객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고, 기존의 방식으로는 풀 수 없는 고객들의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비즈니스 영역에 있어서 새롭게 풀리지 않는 고객의 문제는 곧 그들의 ‘사업기회’라는 것을 의미했죠. 이러한 새로운 사업기회를 잡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오늘 소개해드릴 시도 중 하나는 ‘애자일(Agile)’이라는 방식입니다. 애자일(Agile)이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민첩한’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일종의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론인 ‘애자일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01년 17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애자일 소프트웨어 개발 선언’이라는 성명서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는데요.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설명 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간단하게는 “프로세스를 짧게 가져가면서 결과물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사이클을 반복해서 변화에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보신 분들은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에서 프로젝트 본연의 목적보다 프로젝트 계약서의 요구사항만을 충족하기에 급급했던 기억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있어서도 같은 상황들을 마주했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특히 고객들의 요구가 빠르게 변하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정작 오랜 시간에 걸쳐 제품을 개발했는데 그 제품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상황들을 마주합니다. 이에 따라 제품 자체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는 엄격함보다 빠르고 유연하게 니즈에 대응하는 방법론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개발된 방법론이 애자일 방법론(Agile Methodology)입니다. 애자일 방법론 상에서는 큰 프로젝트의 요구사항들을 여러 단계로 쪼개어서 빠르게 개발하고 테스트하면서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프로젝트의 목적(비전)에 맞춰 방향성을 조정할 수 있고, 동시에 테스트 과정에서의 피드백을 빠르게 반영하여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죠. 현재의 애자일 방법론은 소프트웨어 개발에 있어서도 일대 혁신을 가져다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민첩하게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스타트업(Startup)들의 등장과 스타트업 생태계의 산업 혁신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VUCA로 대표되는 사회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연구방법론에 있어서도 이러한 애자일(Agile)한 접근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연구프로세스 자체보다 진정한 ‘연구협업’이 일어날 수 있다면, 논문화 자체보다 문제해결에의 기여에 초점이 맞춰진 연구를 할 수 있다면, 현장과 연구자가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춰 협업할 수 있다면, 연구계획 자체보다 연구를 통해 해결할 가치에 초점을 맞춰서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연구는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요? 저희는 그런 연구를 적극적 연구, Active Research라고 이름 짓고 사회문제별로 연구공동체를 조성하면서 정말로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목표를 가진, 빠르고 뾰족한 연구들을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2. Active Research란 무엇인가? (Ver 1.0) 저희가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연구인 Active Research의 경우, 기존의 연구라는 관점만으로 해석하기에 분명하게 다른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해 적극적 연구, 즉 Active Research라고 명명하고 그에 대한 특징들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아직 스케치단계이고, 보다 구체적인 원칙과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는 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고민들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Ver 1.0 정도의 내용으로 봐주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정리해본 Active Research는 아래와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문제해결 지향 먼저 Active Research는 먼저 ‘사회문제를 해결한다’라는 명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확한 지향과, 그 지향의 중심이 생각이나 글이 아닌 현장의 변화에 있다는 것은 기존 연구와 분명하게 다른 점들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Active Researcher들은 아래와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정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 및 ’진정성‘을 연구의 동력으로 삼는다. Active Researcher들이 가지고 있는 공적 의식(Public Mind)은 연구의 동력이 되는 동시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연구를 가져가게 합니다. 연구의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문제의식과 진정성은 그 모든 난관들을 넘게 해주고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북극성‘과 같은 요소입니다. 이들은 ’장기적 관점‘으로 연구를 수행한다. Active Researcher들이 풀고자 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다양한 층위의 연구가 연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연구를 설계함에 있어 단회적인 연구설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연구계획을 가지고 연속적인 연구를 수행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지식인’의 유산을 계승합니다. Active Researcher들은 학문공동체의 엄밀성과 연구윤리를 중시하며 기존 학계의 단단하고 깊이 있는 학술문화를 존중합니다. 기존 학계의 연구유산을 계승하며 앞선 연구자들의 선행연구들을 토대로 연구를 수행하고, 과학적 사고와 기준에 따라 연구의 스탠다드를 맞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2) 혁신성 사회적 난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기존의 방식이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tive Research의 주요한 특징은 혁신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제중심으로 연구하면서 간학문적이고 융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과감한 연구도전이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실패를 학습의 일환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기인합니다. 이들은 ’주제중심‘으로 학습하고 연구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사회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에 해당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자료와 정보, 지식들을 주제중심으로 습득합니다. 모든 문제들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다학문적‘ 속성을 가지고 있고, 주제를 중심으로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데에 능숙합니다. 이들은 ’도전적인 연구‘를 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해결의 실마리나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서는 보다 새롭고 도전적인 방식의 연구가 요구되며, 이들은 이러한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 가질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며 도전적인 방법론과 연구방식을 차용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빠르게 실패하고 학습하면서’ 성장합니다. 동시에 이들은 연구의 ’실패‘를 서로 격려하며 보다 나은 연구로 이어질 수 있는 ’학습‘을 중시합니다. 연구 하나하나의 성패여부보다 연구들을 통해 문제해결을 향해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따라 연구계획을 바꾸는 데에 주저하지 않고, 그에 맞는 지식과 툴들을 적극적으로 학습합니다. (3) 협력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한 명의 뛰어난 연구자가 뛰어난 연구물을 낸다고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Active Research를 지향하는 연구자들은 서로의 연구과정과 연구자료를 공유하며 함께 연구를 수행해나가는 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동시에 연구와 현장, 대중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사회가 함께 연구를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도록 돕습니다. 이들은 ’협력‘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풀고자 하는 사회문제는 한명의 영웅이 모든 문제의 원인과 내용을 파악하고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은 기꺼이 자신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을 환영하고, 이들과 연구교류와 데이터 공유, 상호학습을 하고자 하며 여러 협력 연구를 통한 문제해결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현장성 있는 연구‘를 수행하고자 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결국 ’사회문제해결을 통한 현장의 변화‘이기 때문에 이들의 연구는 결국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과 현실 그 자체를 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현장의 당사자 및 현장전문가들과의 교류를 중시하며 현장의 1차 데이터를 토대로 연구를 수행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연구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들의 연구는 결국 사회문제의 본질과 원인, 그리고 대안을 통찰하는 데에 있지만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관심과 지지, 그리고 행동이 요구되어집니다. 이들은 대중의 언어로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공유하고, 대중들과의 소통을 통해 이러한 연구를 확산시키며 또 대중적인 방식으로 연구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3. Active Research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Active Research라는 연구방식은 기존의 연구와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른 측면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계에서 Active Research를 수행하기에는 다소 다른 기준들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Active Research를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이번 발제문에서는 스케치만 그려봅니다. (1) 연구자들의 공동체 먼저는 Active Research의 방향성에 공감하고 이를 지지해줄 수 있는 연구공동체가 필요합니다. Active Research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체득하고, 이미 Active Research를 수행하고 계셨던 연구자들이 그 길을 보여주고 또 함께 Active Research를 진행해나간다면 그 공간이 연구자들이 안전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Active Research를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Active Research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필요합니다. Active Research의 특성이 잘 구분되고, 그 관점으로 어떻게 연구를 바라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Active Research가 가능할 수 있는 연구 프로세스에 대한 개발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Active Research의 관점으로 닮아갈만한 기존 연구와 연구자에 대한 발굴이 필요합니다. 이미 누군가는 사회문제해결을 위해 Active Research의 방식으로 연구를 해온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Active Researcher로 호명하고, 이들이 축적해온 연구의 유산을 Active Research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또 이들과 함께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역별로 함께 연구해나갈 연구공동체를 꾸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직 연구를 모르지만 Active Researcher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이미 연구를 하고 또 배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 Active Research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주기적으로 Active Research에 맞는 활동들을 수행하면서 그 서사를 단단하게 세워나가는 것. 이러한 활동들이 Active Research의 주체가 되는 연구자를 길러내는 연구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활동들이 되어 줄 것입니다. (2) 연구자들을 담아낼 공간 Active Research가 가능하기 위해서 연구자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 공간의 개념은 그저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서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 전반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연구공간과 연구 프로세스는 Active Research에 있어서 보수적으로 반응하기 쉽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는 연구자 개개인을 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중장기적인 연구를 지향한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에, 연구자들이 긴 호흡으로 연구자료들과 연구과정들을 아카이빙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나 같은 방향성을 가진 연구자들의 경우, 서로의 연구과정을 공유하면서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연구를 실제 해낼 수 있는 단계별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Active Research의 특성상 장기간의 주제를 가지고 도전적인 연구를 하게 되기 때문에, 모험적인 활동들을 수행하는 데에 연구를 지탱해 줄 안전망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구자금에 대한 지원이나 연구계획에 대한 펀딩, 연구도전들에 대한 피드백과 코칭 등을 받을 수 있는 여러 환경들의 조성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각 문제별, 주제별로 함께 연구를 축적하고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 필요합니다. 결국 ‘사회문제의 해결’이라는 지향을 가지게 되는 연구의 특성상, 한 두 연구자의 특출난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각 주제별, 영역별 연구자들이 서로의 기여를 보장하는 선에서 연구자료와 연구과정들을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함께 연구를 해나갈 수 있는 협업의 환경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은 어떠한 연구 ‘플랫폼’의 형태를 가질 것이며 그 플랫폼 내에서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연구물을 정리하고 작성하고 교류하는 방식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3) 연구자들 주변의 지지공동체 마지막으로 Active Research에서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는 연구자들의 연구가 실제 사회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지지공동체의 존재입니다. 연구자들의 연구를 지지하고 응원할 뿐만 아니라, 현장과 대중의 시선으로 연구에 적극적으로 피드백하고 더 나아가 연구를 활용해서 실제 사회문제 해결에 적용함으로서 사회문제를 실제로 해결해나가는 공동체의 존재가 연구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연구자들이 연구해내는 결과물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지식 포맷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논문구조는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정리된 지식을 담기에는 적합하지만,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고 필요한 지식들을 얻고 대중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 어렵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연구에 흥미를 가지는 대중들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고 또 필요한 지식들이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지식 포맷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연구물에 대해서 대중들과 함께 토론하고 피드백을 나눌 공론장이 필요합니다. 학회 중심으로 학자들만의 전유물로 지식이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당사자들과 관심을 갖게 되는 전문가 및 일반 대중들이 자유롭게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하고 피드백할 수 있는 공론장이 필요합니다. 이 공론장을 통해 연구자들 또한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의 연구에 피드백을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연구를 지속하고 나아가 사회에 임팩트를 내는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지지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마치 아티스트에게 팬들이 있듯이 연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과정에서 필요한 지원과 지지를 해주고 더 나아가 연구와 현장을 잇는 가교역할을 해줄 수 있는 연구지지자들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지지공동체의 존재는 연구자가 연구를 계속해서 수행하는 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해당 연구의 공공성을 담보하면서 동시에 연구가 실제 사회문제의 해결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에너지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4. 결론 : Active Research의 시작을 선언합니다. 저희는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Active Research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 중 이번 컨퍼런스에서는 24주 사회문제해결형 연구자 부트캠프인 <연구원정>에 참여하신 분들이 발표를 진행하게 되는데요. (1) 연구원정 연구원정(Research Fellowship)은 24주 사회문제해결형 연구자 부트캠프입니다. 총 6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구원정 프로그램은 처음 ‘연구주제설정’부터 시작해서 실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계획서 작성 까지의 전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연구원정의 개발 자체가 Active Research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Active Research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을 느끼고 있는 중에, 결국 이 연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연구 프로세스 자체가 사회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추어 재구성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를 실제로 수행해보기 위해 저희는 기존의 연구를 수행하는 프로세스와 대학원 과정 자체에 대한 해킹을 진행하고, 이 내용을 문제정의 및 문제해결프로세스와 접목시켜서 24주 과정의 연구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 자체가 사회문제해결에 진심인 사람들이 연구를 배울 수 있는 부트캠프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베타테스트를 거친 끝에 현재 기후위기 4기, 공공문제 1기, 교육문제 1기가 진행이 완료된 상황입니다. (다음 기수는 2월 중에 모집 예정입니다.) 연구원정 모집 페이지 (클릭!) 연구원정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배경의 대원들을 만나고 함께 연구를 수행하면서, Active Research에 대한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Active Research의 방향성은 연구연차를 막론하고 누구나 가져갈 수 있는 부분이라는 점과 함께 연구원정을 부트캠프 형태로 운영하면서, 사회문제해결의 진심을 보전하면서 연구역량을 길러가는 연구환경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았죠.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저희는 2월 중에 ARC(Active Researcher Crew)라고 불리는 사회문제해결형 연구 커뮤니티를 런칭할 예정입니다. ARC는 영역별 문제의 해결에 진심인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서 연구를 훈련하고 실제 수행하면서 연구 결과를 만들어내는 온라인 커뮤니티 프로그램입니다. 앞선 연구원정 프로그램이 연구프로세스 전반에 대한 교육과 연구계획서 완성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라면, ARC는 실제 연구를 빠르고 뾰족하게 수행하면서 여러 연구자들과의 협력과 교류를 통해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커뮤니티가 될 예정입니다. ARC에 대해서도 조만간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2) 2024 연구원정 LAUNCH Conference 네, 긴 이야기를 돌고돌아 2024 연구원정 LAUNCH Conference에 도달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24주 내내 함께 진행한 대원분들의 연구주제가 너무도 반짝였기에 그 문제해결에 대한 바이브를 더 많은 분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구요. 다음으로는 이 반짝반짝한 연구주제들이 실제 연구로까지 이어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연구에 대해 지지해주고 지원해줄 수 있는 ‘지지공동체’의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컨퍼런스를 통해 연구계획을 선언하는 대원들을 지지해주고 지원해줄 수 있는 지지자들을 찾고자 하구요. 동시에 연구자분들에게도 이번 컨퍼런스가 계속해서 이 연구들을 수행해나가실 수 있는 큰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기술과 기업가정신을 통해 산업을 혁신하는 기업들인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데모데이Demoday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창업 3년 이내의 극초기 기업들이 투자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사업계획을 발표하는 행사이지요. 사실 이때까지 창업가들은 이렇다 할 뚜렷한 실적을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MVP(Minimum Viable Product)라는 파일럿 결과물과 자신들의 사업계획을 가지고 사업의 가능성을 설득하고, 투자자들은 기업의 현재 자산과 수익이 아닌, 창업가의 역량과 사업계획의 잠재성을 중심으로 투자를 집행합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토스, 배달의민족과 같은 산업을 혁신하는 기업들이 초기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사업계획을 실현해서 산업을 혁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Active Research 또한 스타트업 생태계 못지않게 큰 임팩트를 낼 수 있는 생태계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이 6명의 반짝반짝한, 가슴 뛰는 연구 만큼이나 수백, 수천가지의 문제들이 꼭 연구할 연구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연구자 및 예비연구자분들도 언제든 함께 해주시길 기다리겠구요.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이 분들의 연구에 대해 계속해서 관심 가져주시고, 사회문제들의 해결과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면역체계”를 구축하는 그 날까지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Bennett, N., & Lemoine, J. (2014). What VUCA really means for you. Harvard business review, 92(1/2). 오연서. "나는 텔레그램 N번방에 있었다." Esquire. 2020년 4월 17일자. https://www.esquirekorea.co.kr... 애자일 소프트웨어 개발선언. (2001). https://agilemanifesto.org/iso... "무력감". 네이버 위키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 애자일(Agile)이란 무엇인가, https://m.post.naver.com/viewe...
웹툰 같은 공론장 : 공론장을 플랫폼화 하기
안녕하세요. 솔라시포럼 첫째날 저녁 세션 [공론장 복원의 조건 : 공공지식인과 디지털 시민광장]에서 발제를 맡게 된 (주) 나이오트의 공동대표 하윤상입니다. 저는 사회문제해결형 연구자를 양성하는 실습형 연구훈련플랫폼 <연구탐사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기존 대학원의 학과중심 시스템을 보완하면서 연구자들의 ‘진심’과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고 있구요. 현재 기후위기, 공공문제, 교육문제 영역의 연구자들을 양성하면서 문제해결형 연구자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연구탐사대 하지만 오늘 발제는 저희 회사 홍보를 하기 위함은 아니구요. 저는 스타트업 대표인 동시에 사회문제해결에 있어 플랫폼 방식을 접목하는 ‘플랫폼 거버넌스’에 대해 연구해 온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운영하고 있는 스타트업 또한 사회문제해결을 플랫폼 방식으로 풀어내기 위한 저희의 실험이자 연구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저희 서비스와 스타트업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지면을 통해 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세션에 오신 분들이 모두 동의하시듯이, 사회 한가운데에 공론장이 붕괴되고 그로 인해 사회문제들이 사회 속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재발 및 변이되고 있습니다. 그 원인과 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저는 오늘 그 중에서도 공론장을 ‘혁신’하는 한 가지 방안에 대해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속칭 ‘플랫폼화(Platformization)’라고 불리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I. 서론 : 공론장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웹툰이라고? 플랫폼화(Platformization) : 기업의 성장을 넘어 산업을 혁신하는 현상 아시다시피 배달의민족, 넷플릭스, 유튜브부터 쿠팡, 야놀자 등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일상에 플랫폼 서비스는 굉장히 깊숙히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해당 기업들이 단순히 ‘유명해졌다’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를 넘어서, 기존의 산업 자체를 바꾸어놓는 상황들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영화산업이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를 비롯한 OTT 산업에 의해 재편되고 있는 이야기나 쿠팡이 이마트의 매출을 앞질렀다는 이야기들은 심심치 않게 듣고 있으실 거에요. 쿠팡, 유통 매출서 사상 처음 신세계·이마트 앞질렀다 | 중앙일보 이러한 현상을 보통 플랫폼화(Platformization)라고 부르게 되는데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기존 산업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방법들을 채택한 신생기업들이 기존 산업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산업을 혁신하는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쿠팡이 당일배송을 만들어내고, 배달의민족이 배달이 불가능하던 음식점들의 배달을 가능하게 하고, 유튜브가 수많은 채널들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처럼요. 이렇게 산업 자체가 혁신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플랫폼(Platform)’이 생겨나게 되고 그 플랫폼을 기반으로 신생산업이 형성되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어요. 저는 이러한 디지털 기술로 인한 산업의 변화가 처음에는 비즈니스 영역에서 일어났지만 곧이어 시민사회를 비롯한 공공영역에서도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미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속도와 방식이 갈수록 가속화될 것이라 생각해요. 이것은 마치 신대륙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골드러시(Gold Rush)라고 불리는 상인들의 진출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이후 메이플라워호를 비롯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면서 사회 전체의 판이 바뀌었던 때와 흡사하다 생각합니다. 공공영역의 플랫폼화에 있어 그 내용을 대비하고 또 대안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할 때에 저는 ‘만화산업’에 있어 ‘웹툰 플랫폼’의 등장을 살펴보는 것이 그 양상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데에 가장 유용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웹툰이 가지는 ‘스토리텔링’과 웹툰이 ‘콘텐츠’로서 보이는 양상들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론장’의 형태와 가장 흡사하다고 보였거든요. 공론장의 복원에 대해 고민하는 이 때에, 어쩌면 사양산업에 가까웠던 만화시장이 전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면서 수많은 웹툰 작가들과 웹툰 작품들, 그리고 웹툰을 보는 것이 보편화된 문화를 만들어낸 과정들을 톺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글은 이번 솔라시 포럼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발제문이기 때문에 정제되어 있는 글이라기보다는 어떤 주장들의 묶음에 가깝습니다. 시일 내에 근거와 자료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면과 시간의 제약상 논리가 정교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공론장의 복원에 필요한 일종의 인사이트로서 바라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I. 웹툰과 공론장 1. 웹툰 플랫폼 : 포털이 만화를 한다고? 2006년에서 2023년 : 만화책에서 웹툰으로 3대 출판사 점유율 63% 만화 시장 양극화 심화 위 기사는 2006년 4월 14일에 쓰여진 기사인데요. 만화시장이 대원씨아이, 학산문화사, 서울문화사 등 3개사에 의해 63% 이상 점유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해당 기사에서는 2005년 기준 출판만화 시장 규모가 아동, 학습만화시장을 제외하고도 1242억원, 만화대여시장은 3251억원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하지만 반면 온라인 만화서비스시장은 142억원에 불과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웹툰시장 연매출 1.5조 돌파…5년새 4배 성장 반면 15년여가 지난 지금 웹툰시장은 연매출 1.5조원에 육박하는 시장으로 변모했습니다. 특히나 기사에 따르면 2017년 3799억원이던 매출이 4년새에 4.1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의미는 사실 웹툰시장이 지금 보여주는 1.5조원 규모가 이제 시작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반면 만화출판업의 경우 2021년 기준 5710억원으로 웹툰시장의 3분의 1 수준이 되었습니다. 만화대여시장은 290억으로 더욱 쪼그라들게 되었구요. 빠르게 성장한 웹툰 시장…무너지는 네이버·카카오 ‘상생 생태계’ 분명 15년 사이에 만화시장은 만화책에서 웹툰으로 옮겨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시기를 비슷하게 관통한 30대 분들의 경우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책방에서 만화책을 대여해서 교실에서 돌려보던 것이 익숙했던 기억이 있지만 현재는 모두가 핸드폰을 통해 웹툰을 보는 데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거에요. 다음 ‘만화속세상’의 시작 : 포털이 만화를 한다고? 이 모든 것의 시작에 2003년 포털사이트 다음의 ‘만화속세상’이 있습니다. 사실 그 전부터 ‘인터넷만화’라는 형태의 연재물들이 존재했고 또한 여러 포털사이트에서도 만화책을 서비스하고 있었지만, 다음의 만화속세상은 최초의 웹툰 연재시스템을 도입한 ‘웹툰 플랫폼’이었습니다. 다음이라는 포털 사이트가 직접 작가를 수급하면서 본격적으로 만화시장이 뛰어든 때이기도 했죠. 뒤이어 2004년 네이버 웹툰이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당시에 포털에서 만화를 본다는 것은 기존 만화시장의 만화책을 온라인화해서 판매하지 않는 이상 일종의 ‘부가서비스’에 가까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만화책시장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사람들 또한 만화책을 보는 것에 익숙해 있었지 컴퓨터 화면을 통해 만화를 본다는 것은 굉장히 생소한 일이었거든요.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당시 PC의 보급률이 높아지고 포털 사이트의 이용률이 급증하면서 많은 부분들이 인터넷으로 인해 바뀌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그 맥락에서 웹툰 또한 같은 방식으로 시도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어요.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른 기존 산업의 전환 사실 이 이야기는 비단 만화시장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잘 아실 거에요. 영화산업은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산업에 의해 흔들리고 있구요. 더 이상 우리는 TV에 나오는 KBS, SBS, MBC만을 보지 않고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수많은 채널들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TV에서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볼 수 있는 방법 또한 역으로 나오는 상황이기도 하죠. 이 산업들의 전환은 모두 ‘기존의 상식’을 깨뜨리는 도전들이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만화를 책으로만 봐야 해?”라는 질문, “영화를 영화관에서만 봐야 해?”라는 질문, 더 나아가 “방송을 방송사에서만 만들어야 해?”라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기술의 전환에 따라 기존의 채널이 아닌, 새롭게 우리의 손에 쥐어진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접근하는 채널들이 주어졌고. 그 채널들을 일종의 ‘플랫폼’들이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거기에서 기존의 산업보다 나은 콘텐츠들이 제공될 때에 자연스럽게 기존의 상식은 새로운 상식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죠. 공론장에서 우리의 질문 : 사회문제는 꼭 정부만 해결해야 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비즈니스 영역의 혁신이 사회의 혁신보다 반 보 빠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에. 우리는 사실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어요. “사회문제는 꼭 정부만 해결해야 해?”라고 말이죠. 만화책시장이 거대했을 당시에 인터넷만화시장이 없던 것이 아닌 것처럼, 지금도 사회문제의 해결을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여러 활동들이 존재해요. 사회적기업이 그러하고 협동조합이 그러하죠.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저 질문이 “꼭 그런건 아니지”를 넘어 “사회문제의 대부분은 정부가 해결하지 않아”라는 이야기로까지 넘어갈 정도의 변화 앞에 서 있는 맥락에서 던져지는 질문이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사실 많은 부분에 있어 시민사회에서는 “법제도의 변화” 혹은 “예산 및 정책의 확보”가 굉장히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정말로 맞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치 포털사이트가 ‘기존 만화책시장이 아닌, 우리가 직접 만화가를 수급해서 우리 웹툰을 보는 별도의 플랫폼을 구축할거야’라는 마인드로 웹툰 플랫폼을 시작했던 것처럼, ‘기존 정부의 예산과 정책이 아닌, 우리가 직접 혁신가를 통해 우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별도의 플랫폼을 구축할거야’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거죠. 정부 예산에 비해 민간의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구요? 우리나라는 민간기부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요?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웹툰시장 또한 기존 만화책시장의 30분의 1에 불과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그 포털사이트조차 두세명이서 시작했던 아주 작은 소기업에 불과했다는 점 또한요.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 모바일의 발달은 점과 같은 조직이 산업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전환을 만들어내고 있구요. 아직 공공과 시민사회영역에는 그 변화가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2. 만화책이 아닌, 웹툰 : 소비자를 향한 지난한 역사 “초기 작가들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 우리가 이 정도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내면 그 때 1등 작가는 얼마를 벌고 있을거야. 나는 네이버 웹툰에서 연 1억 버는 작가 만드는 게 목표야. 그 다음에는 연 5억 버는 작가를 만드는게 목표야. 연 10억 버는 작가를 만들거야. 이걸 계속해서 이야기해왔어요.이제 1등 작가는 1년에 124억을 벌어요.” - 네이버 웹툰 김준구 대표 인터뷰 중 몇달 하다가 때려치는 것 아니냐 2000년대 당시 만화시장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만화단행본의 발행종수도 2008년 기준 3755종으로 이 중 한국만화는 1,190종이었고 번역만화는 2,565종이었습니다.(한국 만화산업의 카투노믹스 전략) 만화단행본의 종류 자체가 적을 뿐더러 많은 부분 해외의 만화를 번역 제공하는 경향이 있었죠. 당시에 네이버 만화에서 일을 시작한 김준구 현 네이버웹툰 대표는 ‘몇 달 하다가 이 일 때려치는 것이 아니냐’, ‘네이버도 하다가 잘 안된 사업 접은거 많던데’하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할 수 있는 이야기였죠. 안 그래도 영세하고 해외의존율이 높은 만화시장을 심지어 한번도 해보지 않은 포털에서 제공하기로 한다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큰 일이었을테니깐요. 네이버웹툰에서 OO를 만들어 팔고 있는 CEO에게, 직접 들어보는 회사 이야기 사실 우리가 듣고 있는 이야기이지 않을까요. ‘뉴미디어 산업 아무나 하는 것 아니다’, ‘몇 달 하다가 디지털 공론장도 때려치는 것 아니냐’하는 이야기들을 듣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신문과 뉴스를 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마치 영세한 만화시장을 바라보던 당시의 시선과 닮아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만화는 여전히 재미있고, 그 재미만 제대로 전달할 채널을 확보한다면 반드시 성공한다 앞서 조금 이야기했지만 2003년 다음 만화속세상부터 2004년 네이버웹툰에 이르기까지 등장한 ‘웹툰 연재 플랫폼’들은 기존 만화시장을 디지털화 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화’라는 본질 자체를 디지털 상에 직접 구현하기로 마음 먹고 생겨난 플랫폼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도전하게 된 이들이 갖게 되었던 확신은 결국 ‘콘텐츠에 대한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만화는 여전히 너무 재미있고, 그 재미를 제대로 소비자들에게 전달만 해줄 수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확장되고 확산될 수 있는 산업일텐데 다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을테니깐요. 디지털 기술의 발달을 통해 보다 나은 방식으로 만화를 대중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다면 만화시장이 가능성이 있는 콘텐츠시장이라 믿었고 그것을 위한 전혀 새로운 환경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2023년 1분기 기준으로 웹툰만 5,034작품이 국내에서 연재되고 있고 실제 1조 5천억원 규모의 웹툰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저희는 함께 보고 있습니다. (2023년 1분기 만화 웹툰 유통 통계 자료) 2023년 1분기 만화·웹툰 유통 통계 자료 아직 답을 모를 뿐, 반드시 답은 존재한다고 믿는 것 제가 직접 웹툰 서비스 산업에 종사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만화시장에서 웹툰이 주도권을 가져가고 더 나아가 시장 자체의 급격한 성장을 만들어 냈는가에 대한 사업적 비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는 ‘만화’라는 가장 본질적인 재미를 가진 요소를 기반으로 20년여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만화콘텐츠의 포맷을 시도해 온, 그리고 실제로 산업 자체를 변화시킨 사례를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재미에 초점을 맞추는 만화를 플랫폼화해서 소비자들의 수요를 맞추는 데에도 20년의 시간이 걸렸다면, 공론장의 복원과 혁신을 이야기하는 우리 또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보다 긴 호흡을 가지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20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 ‘만화는 재미있다’라는 명제는 변함이 없이 사업의 방향성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보다 더 강한 ‘공론의 가치’라는 명제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지긋지긋한 일’을 ‘10년 이상’ 할 각오로 뛰어드는 것 동시에 중요한 것은 이 20년의 시간동안, 이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만화의 디지털화에 대한 필요성’을 공론화하기 위해 성명서를 내고 인터뷰를 하고 주장을 정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만화는 재미있다’라는 명제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만화작가들을 섭외하고 수천편의 만화를 연재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토대로 실험하면서 소비자들의 반응에 최적화된 포맷을 찾아내었고 해당 포맷과 콘텐츠가 만나게 되었을 때에 소비자들은 점차 만화책에서 웹툰으로 옮겨오게 되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공론장을 복원하고 혁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론장 복원의 ‘당위성’이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공론의 가치’를 다시금 경험할 수 있도록, 보다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환경과 채널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웹툰시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공급자의 수급과 사이트의 구성, 콘텐츠 구성 포맷의 형태, 댓글 방식과 전달 방식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정말이지 ‘지난한’ 과정들이 필요하고 그 과정이 정말 10년 이상 소요되는 아주 ‘지긋지긋한’ 활동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만이 오롯이 시민들에게 ‘공론의 가치’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주고, 그것만이 시민들이 다시 공론장으로 돌아와 공론장을 복원하고 혁신하여, 기존의 공론장 이상의 공론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는 왕도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만 공론장을 혁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렇게 해서라도 공론장을 복원하고 혁신할 수 있다면, 그 일은 10년이든 20년이든 충분히 삶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3. 기다무(기다리면 무료) : 가치는 존재한다. 그것을 동력으로 바꿔낼 방법 ‘사업화’라는 웹툰업계의 난제 웹툰 업계에 있어서 사실 가장 큰 난관은 ‘사업화’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실제 웹툰 생태계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결국 웹툰을 그리는 작가들이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했지만, 여전히 인터넷 환경에서 웹툰은 무료로 소비하는 콘텐츠에 가까웠고 일부 웹툰에 달리는 광고를 통해 수익을 내는 정도에 불과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2014년 웹툰시장은 이전에 비해 많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718억원 규모로 2000년대 만화책시장의 절반 규모를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3년 콘텐츠 오픈마켓 형식으로 콘텐츠를 유료화해서 판매하는 시장을 형성하겠다는 목적으로 ‘카카오 페이지’가 런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만화를 비롯한 콘텐츠의 유료화에 대한 시도가 시작됩니다. 모바일 기기의 등장에 따라 보다 최적화된 형태로 소비자들에게 콘텐츠를 제공한다면 그에 대한 시장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했고, 이에 대한 시도를 해보기에 이르게 되죠. 하지만 800여개의 CP(Contents Provider)가 참여한 대규모 런칭에도 불구하고 일 100만원대의 결제액에 불과한 처참한 성적표를 가지고 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유료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러한 소비자들의 지갑을 여는 것은 아무리 카카오라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죠. 변하지 않는 명제 : 만화는 재미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만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재미를 얻고 있다’라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다만 내가 느끼는 재미와 내가 그 재미에 대해 금액을 지불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미스매치가 존재했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재미가 돈을 낼 정도는 아닌 것인가’와 ‘돈을 낼 정도의 재미이지만, 아직 느낀 가치가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지 못한 것인가’ 사이에서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카카오페이지는 후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유료 콘텐츠 플랫폼에 뛰어들었고 하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해 그 자리에서 고전을 하고 있었던 셈이죠. 기다무 : 이용자의 시간을 사는 유료모델 그러던 중 2014년, 속칭 ‘기다무(기다리면 무료)’라는 유료 결제 모델이 도입되면서 카카오페이지의 매출이 반전되기 시작합니다. 기다무의 경우, 고객이 보유한 이용권이 소진된 상황에서 일정한 주기, 예를 들면 1주일이 지나면 1회차 이용권을 자동 충전해주는 모델입니다. 사실 시간만 기다린다면 얼마든지 돈을 내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이용권인 셈이죠. 하지만 여기에서 카카오페이지는 ‘이용권을 유료로 구매할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합니다. 만화의 다음 화를 보다 빨리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사람들의 지갑을 열 방도를 찾아낸 것이었죠. 기다무 모델이 도입된 이후 구매전환율은 25%까지 올라가면서 작품을 클릭한 사람 100명 중 25명이 결제를 하게 되었고 일거래액은 도입 기준 한달 만에 2배 이상 급등하면서 카카오페이지의 수익모델이 비로소 안착하게 됩니다. [DBR] “기다리면 무료… 콘텐츠 보는 시간을 판다”, 발상 전환 통해 몰입하는 소비 경험 선사 기다무 모델은 플랫폼 자체의 수익 뿐만 아니라 웹툰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기존 만화책시장(9:1) 대비 높은 수준의 수익배분율(7:3)과 함께 만화에 대한 지불의사가 높아지면서 그로 인해 높은 수익을 얻는 웹툰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는 새로운 웹툰 작가들의 유입을 불러일으키면서 웹툰 생태계의 질과 양 또한 개선하게 됩니다. 콘텐츠에 대해 가치를 지불하고 그 가치에 작가들이 반응하게 되면서 하나의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를 통해 생태계의 역동적인 성장을 불러오게 된 것이죠. 시민들은 소비로 가치를 표현한다 : 시장주의의 악마화 걷어내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시민들이 직접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원’의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사실 정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민운동의 경우, 시민들의 세금으로 형성되는 공적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있어서 예산을 확보하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시민들이 직접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자원’을 어디에서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 현재 형성되어 있는 시민들의 ‘가치소비’에 대한 부분들을 짚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재화를 수동적으로 구매하던 과거와 달리, 선택지가 많아지고 무엇보다 개인의 취향과 선호, 가치와 개성이 생겨난 현재 시민들은 자신의 특성을 ‘소비’를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죠. 신자유주의 담론과 자본주의의 폐해 등에 대한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그저 ‘시장화’의 방식으로 접근하기보다 ‘공적자원을 형성하는 방식의 변화’ 혹은 ‘공론장에서 자원동원의 방식’에 대한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무조건적으로 가치와 비례하지 않는 방식으로 강제적으로 수취해가는 세금제도 자체가 가지는 모순과 한계 또한 분명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말 ‘자원’의 흐름에 ‘가치’가 담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쩌면 새로운 공적 자원의 형성방식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웹툰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기다무’의 예시는, 그저 시장주의 하에서 수동적으로 구매하는 시민들의 모양이 아닌 자신의 ‘재미’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기 시작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도리어 웹툰 플랫폼을 통해 시민 개개인들이 자신의 재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채널을 확보했고, 그 채널 하에서 ‘다음 화를 기다리는 시간을 돈 주고 산다’라는 개념에 반응하면서 유료 콘텐츠 플랫폼 시장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또 그에 따라 역동적인 웹툰 생태계가 조성되게 된 것이구요. 이미 일상의 많은 부분들에서 ‘소비’를 통해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이 일반화된 현재,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시장주의를 손쉽게 악마화하고 이를 그저 외면하고 배척하는 방식을 고수하기보다, 시장주의의 논리를 보다 심도깊게 들여다보면서 어떠한 방식으로 시장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시장제도 안에 ‘가치’와 ‘윤리’를 담으면서 ‘공적 자원’을 형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과 고민, 씨름을 시작해야 합니다. 마치 웹툰 플랫폼이 ‘재미’를 ‘재화’로 환산할 방식을 찾은 것처럼 말이죠. 4. 도전만화가 : 새로운 크리에이터들 도전만화 : 도제식 만화작가양성에서 실험식 만화작가성장으로 웹툰 생태계의 등장은 만화의 소비자들에게 대한 혁신일 뿐만 아니라 만화의 공급자인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혁신이었습니다. 과거의 만화계에서는 만화출판사가 과점상태로 한정된 채널이 있는 상황에서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도 몇몇 유명 만화가들의 문하에 들어가 도제식으로 만화작업을 도우면서 성장하는 트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네이버웹툰이 2006년 도입한 ‘도전 만화’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만화작가들에게도 일대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일단 웹툰 서비스를 통해 기존의 만화출판사 중심의 만화지면이 아닌 방식으로도 만화를 연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동시에 등장한 ‘도전 만화’ 시스템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만화가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도전 만화는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자기 작품을 미리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독자들의 피드백을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정식 연재를 얻지 못하더라도 데뷔 전부터 도전 만화에 만화를 게시하면서 팬을 확보할 수 있고, 보다 수평적인 환경에서 실력으로 팬덤을 직접 확보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하게 된 것이었죠. 도전 만화는 웹툰 플랫폼 입장에서도 양질의 만화작가들을 다양하게 확보할 수 있는 채널로 작용했고, 만화가들 또한 기존의 도제식 방식이 아닌, 자신이 연재하고자 하는 만화만 있다면 언제든 업로드하고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는 채널로 작용했습니다. '도전 만화'로 폭발적 성장…웹툰을 메이저산업으로 끌어올려 플랫폼에서 공급자의 성장 : 레퍼런스 기반의 자가학습 이러한 방식은 비단 웹툰 뿐만 아니라 플랫폼 서비스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소비자와 공급자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만날 수 있게 되면서 공급자들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디지털 기반으로 누구든 만화를 그리거나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한 부분과도 맞물립니다. 도전만화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올리면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팬덤을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여기에는 만화 작가들의 생애주기형 성장 또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기존의 방식이 유명 만화가의 문하에서 만화가의 일을 도우면서 도제식으로 만화기법들을 전수받는 ‘유명만화가의 노하우 전수’라는 형태로 만화작가의 성장이 이루어졌다면, 도전만화를 비롯한 연재 방식에서 주된 학습방식은 ‘직접 연재하고 독자의 반응과 피드백을 토대로 실험하고 성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실력이 없더라도 일단 만화를 그리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이에 맞추어서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서 만화작가들에게는 자신에게 정답을 전수해 줄 ‘멘토(Mentor)’가 아니라 자신만의 환경에서 답을 찾아나가는 데에 도움을 줄 ‘레퍼런스(Reference)’가 필요하게 됩니다. 의 나윤희 작가 인터뷰 이러한 공급자의 새로운 학습방식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 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와도 맞물립니다. 소비자의 선호가 다양해지면서 특정 유명만화가들의 작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던 계층이 아닌, 자신의 선호에 맞는 만화를 찾아 읽는 소비자가 등장하게 되었죠. 이에 따라 마이너한 주제와 작법이라 하더라도 그에 맞는 소비자들을 찾을 수 있는 채널이 열린 셈입니다. 이는 곧 ‘만화를 잘 그리는 법’에 대한 정답이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만화 주제와 작법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과 연관된 ‘레퍼런스’를 찾고 이를 통해 학습하는 방식으로 만화가가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러한 레퍼런스를 찾고 학습할 환경이 조성된 부분 또한 플랫폼의 역할이 큽니다. 레퍼런스의 내러티브 : 나는 어떤 만화 작가가 되고 싶은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레퍼런스(Reference)는 자신의 주제와 관련된 동료를 일컫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동기부여와 영감을 제공해주고 내러티브(Narrative)를 제공해주는 작품 및 작가 간의 상호작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웹툰 생태계 내에서 성공한 일부 작품들을 보면서 만화작가들은 ‘나도 저런 작가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문화가 신진 작가들에게서 재생산되면서 웹툰 생태계 안에 하나의 문화와 내러티브가 안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레퍼런스의 내러티브는 단순히 ‘저 사람 같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라는 논리보다는 큰 개념입니다. 해당 작가의 팬으로서 그 만화에서 받은 영감을 자신의 만화 안에 철학으로 가져가게 되고, 작가가 보여주는 태도나 작품의 탁월함 및 특성에 따라 이를 재생산하는 신진 작가들의 문화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어느 산업이든 그저 ‘도전만화’ 형태의 오픈 플랫폼과 마켓을 열어놓고 ‘와서 쓰고 읽고 배워라’라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공급자들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공급자들이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고 기꺼이 ‘나도 이런 공급자가 되고 싶다’라는 동력을 만들게 될 때,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내러티브’가 생태계 내에 형성되게 될 때에 새로운 세대의 공급자들이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성장하는 생애주기가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정말, 다음세대가 없을까? 공론장에서 결국 나타나는 큰 문제 중 하나는 ‘다음 세대 플레이어’의 부재이기도 합니다. 다음 세대가 유입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저 ‘세대와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유입과 학습과정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서 패러다임에 상관없이 관통하는 **‘공론의 가치’**와 이러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예비 플레이어들을 위한 플랫폼과 채널을 구축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5. 스토리IP(지적재산권) : 만화와 소설이 뒤흔든 방송산업과 영화산업 스토리IP : 웹툰을 넘어 방송과 영화까지 혁신하다 웹툰 생태계의 성장은 비단 웹툰 시장 자체만의 활성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처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미생>이나 <이태원 클라쓰>부터, 최근에 큰 화제를 낳았던 <재벌집 막내아들>과 최근에 디즈니플러스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는 <무빙>에 이르기까지. 웹툰을 소재로 만든 드라마 및 영화는 방송산업과 영화산업에까지 웹툰의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MCU(Marvel Cinematic Universe)는 말할 것도 없지요. [황금알 낳는 웹툰 IP③] [인터뷰] 웹툰은 '스토리 창고'…네이버웹툰, 전 세계서 스토리 IP 가장 많아 | 아주경제 웹툰이 가지는 이러한 파급력은 ‘OSMU(One Source Multi Use)’라는 전략과도 맞닿습니다. 웹툰과 드라마, 영화 및 게임 등이 관통하고 있는 공통의 요소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정말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는 콘텐츠라면 그 콘텐츠가 소설이나 만화로 뿐만 아니라 실제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 제작되더라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죠. 물론 각 단계에 있어 어떠한 기법들을 얼마나 적절하게 잘 활용하느냐가 큰 관건이 되겠지만, 그 중심에는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속칭 스토리IP(Intellectual Property, 지적재산권)이라 불리는 이러한 원천은 웹툰시장과 소설시장 뿐만 아니라 방송산업과 영화산업에서도 큰 효과를 가진다는 점이 검증되었고 비교적 적은 자원으로 스토리텔링을 선보이고 검증할 수 있는 웹툰 플랫폼에서 스토리의 매력을 검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를 응용 생산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토리IP의 원천 :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결국 ‘스토리IP’라고 하게 되는 본질이 중심에 위치하면서 콘텐츠의 형태가 발전하고 그것이 부가가치를 추가적으로 창출하는 방식으로 가치사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다시 웹툰 플랫폼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누가 그렸냐’ 혹은 ‘작가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냐’와 같은 요소보다도 ‘웹툰이 얼마나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느냐’의 요소가 중요해지는 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앞서 언급한 만화가들의 수평적인 기회제공과 확장으로까지 연결되었다는 부분을 알 수 있는 셈이죠. 지식IP : 문제를 해결하는 원천지식 ‘스토리IP’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발전시켜가는 생애주기모델은 사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공론장에 있어서도 충분히 참고해볼만한 레퍼런스가 되어줍니다. 결국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은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고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파급력이 있느냐는 것은 아이디어의 초기단계에서 효과성과 대중의 수용도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력과 예산을 투입해서 문제해결의 스케일을 키워가는 방식으로 확장이 가능하기 때문인 것이겠죠. 저는 이러한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 핵심이 되는 아이디어를 ‘지식IP’라고 부릅니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책을 도출해내는 지식에서 시작이 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처음에는 한 두 줄의 문장과 여러 자료들을 덧붙인 하나의 논문과 보고서 등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추가적인 보강을 통해 법률안이 되기도, 정책제안서가 되기도, 심층기획기사가 되기도, 또 때로는 사업계획서가 되기도 할 수 있는 것이죠. 공론장의 새로운 역할 : 사회문제해결의 아이디어 실험장 여기에서 우리는 공론장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됩니다. 공론장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대안들의 ‘지식IP’를 발굴하고 검증하는 장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여기에서 검증이 완료된 지식IP를 여러 방식으로 대안화해서 시도해보고 그 경험들을 축적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대안의 시도와 경험들이 다시금 공론장에서 논의되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나은 대안들이 시도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공론장은 그저 의견을 주고받는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회문제해결” 혹은 “공적 가치를 드러내는” 핵심공간이 될 것입니다. 연구문화 : 사실에 입각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공론 문화 만들기 이를 위해서는 공론장의 문화가 “문제해결”에 초점이 맞춰지는 문화로 조성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의견들이 오갈 수 있지만 해당 의견들이 정말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웹툰 플랫폼에서 공유하는 문화가 ‘재밌는 만화’에 초점을 맞춰지게 되었듯이 말이죠.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공론장을 풀어내는 플랫폼에서 많은 실험과 검증을 통해 제도를 설계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연구문화’가 공론장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화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구문화라 함은 ‘사실에 입각해서 검증하고 논의하는 문화’를 일컫습니다. 의견과 방향성에 상관없이 각 주장들은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 근거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문화이지요. 이는 한편으로 각자가 가지는 가치적 방향성들에 대한 포용이 되기도 하고, 그 방향성들이 ‘사실’과 ‘현실성’이라는 토대 위에만 올려져 있다면 얼마든지 토론과 논의를 통해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추어서 연구문화를 토대로 공론장을 형성하고 공론장에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대안 아이디어들을 발굴할 수 있다면, 해당 아이디어들을 활용해서 사회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해결에 성공한 케이스들에 있어서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정책정당, 정말 불가능한 꿈일까? 그렇게 공론장 안에 지식IP의 케이스들이 쌓이게 된다면, 각 지식IP의 케이스들을 토대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들에 대한 제언들이 쌓이게 될 것이고 이러한 제언들을 모아 일종의 ‘공약’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꿈꾸어 오던 ‘정책정당’ 또한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웹툰 플랫폼에서 발굴된 스토리IP로 드라마와 영화를 만들어 콘텐츠를 보급하는 전략에 맞추어, 공론장 플랫폼에서 발굴된 지식IP로 시민운동과 정책제안, 소셜벤처의 기획 등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이 다변화되고 급변하는 사회에 있어서 플랫폼 방식의 사회문제 해결 프로세스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또한 그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역할은 당연히 ‘공론장’이 될 수 밖에 없겠죠. c.f. 플랫폼 디스토피아 : 플랫폼의 공공성을 향하여 앞서 저는 웹툰 생태계를 일종의 ‘성공사례’로 이야기하면서 논의를 전개해갔지만 사실 웹툰 플랫폼과 생태계 또한 많은 모순과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웹툰 작가들이 다양해지면서 웹툰 작가들의 처우 문제 또한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고 플랫폼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플랫폼에 웹툰 생태계가 종속되는 현상 또한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웹툰 플랫폼 내에서 인기 웹툰이 되기 위해 보다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창작활동을 수행하기보다 이미 정해진 성공공식에 맞춰서 찍어내듯이 웹툰이 생산되는 문화 또한 드러나면서 웹툰 플랫폼의 개혁을 위한 고민 또한 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상하고자 하는 공론장은 그저 비즈니스 영역의 ‘플랫폼’을 본받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영역의 플랫폼을 넘어 ‘공적 가치’를 형성하고 그러한 문화들을 조성할 수 있는 일종의 ‘커뮤니티형 플랫폼’을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플랫폼 비즈니스가 아닌 커뮤니티형 플랫폼이 성공적으로 안착된 사례는 아직까지는 찾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답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 답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공론장 플랫폼을 구성하면서 찾아나서야 할 것은 ‘플랫폼 비즈니스를 넘어 공적 가치가 촉진되고 발전 계승되는 플랫폼’에 대한 구상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논의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III. 결론 : 전환시대의 논리, 유길준의 자리 “조선은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망하고 있는 것이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 구한말, 세도정치를 비롯한 사회적 모순이 최고조에 달하고 서양문명의 등장으로 사회의 거대한 변화가 점쳐지던 시기에 유길준이라는 인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자 고종 휘하에서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의 발간을 준비하기도 했던 시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일본과 미국의 유학을 갔다왔던 유길준은 갑신정변의 소식을 전해듣고 잠을 이루지 못해 이듬해에 귀국하여 서유견문의 집필을 준비합니다. 갑자기 웹툰 얘기를 하다가 왠 유길준? 이라 하실 수 있지만 제가 유길준이라는 인물을 소환하게 되는 것은 그가 마주했던 ‘전환시대’에 대한 당혹감과 고민의 정도가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전환시대’에 느끼고 있는 당혹감과 가장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 사회의 변화를 먼저 감지하고 또 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한 인물이지만, 그 분투를 사회적 공감대와 실질적인 변화로 꽃피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역사에 '만약에'라는 질문이 가능하다면, 구한말의 시대적 전환기에 사회의 방향타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진 인물은 나라의 치열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분투했던 유길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공론장의 복원에 대해 고민하면서 모여 있는 이 세션에서 우리는 구한말에 준하는 변화 앞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노론과 소론 중에서 누가 세력을 잡을 것이냐에 대해 정치적 갈등을 하는 사이, 전환시대의 논리를 포착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만드는 데에 실패했던 과거를 답습하지 않은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도리어 이 전환시대의 흐름을 동력삼아 우리가 다시 한번 ‘공론장의 복원과 혁신’을 이루어내어서, 기존의 정치와 사회영역에서 꿈꾸고 기대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구자들은 더욱 새롭고 더욱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정치적 기획을 공동으로 고안하기 위한 조직의 기틀을 만들고 이러한 정치적 기획의 성공을 담보할 조직적 조건을 갖추는 데 공헌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제헌의회와 미국혁명 당시의 필라델피아의회는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법학 지식을 갖추고 몽테스키외를 읽고 민주적 구조를 고안해내었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고안해내야 합니다. 물론 혹자는 “의회, 유럽노조연맹과 같이 이런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모든 종류의 기구가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기구가 어떤 대안적인 정치적 기획을 가지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여기서 길게 논의하지는 않겠습니다. 결국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고안하고 실현하는데 있어서 가로놓인 장애물을 제거하면서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이 장애물의 일부분은 이것을 제거해야 할 임무를 띤 사회운동 안에서, 특히 노조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 '지식인들이여, 분노하라!' 중(르몽드 디플로마티크 02년 2월호) -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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