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세월호참사에서 10.29이태원참사까지> 재난피해자 권리보장을 위한 정책포럼
이번 정책포럼은 재난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해 기획된 연속포럼의 첫 번째 포럼이다. 1부 ‘재난보도와 사회적 과제’와 2부 ‘진상규명과 국가의 역할’로 진행되었다. 여섯 분의 발제자는 10년간 재난 참사를 대하는 국가 및 언론의 태도와 재난피해자 권리 보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짚고,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나아야가야 할지에 대한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시간 진행되는 포럼임에도 많은 분들께서 참여하였다.   본격적인 정책포럼에 앞서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박진님,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이정민님과, 4.16재단 이사장 박승렬님의 인사말이 있었다.   1부 재난보도와 사회적 과제 1부에서는 재난보도에 관해 심도 있는 담론이 진행되었다. 총 세 분의 발제가 진행되었고, 마지막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발제 1 : 세월호 10주기, 언론은 무엇을 보도하고 있나?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소장 김언경님은 4.16 언론 보도 분석의 실태조사를 설명하고 비평하였다. 김언경님은 뉴스 분석 서비스 빅카인즈를 이용해 언론 보도 분석을 진행했다. 4.16참사 보도량 분석, 세월호 10주기 특집 보도와 사안별 보도 비평으로 나누어서 설명해주었다. 4.16참사 보도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추세지만, 세월호 주기가 되면 다시 보도량이 증가하는 걸 알 수 있고 한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주요 언론사는 특집 보도를 내놨다. MBC는 4월 16일부터 9건의 보도를 세월호 10주기에 할애하며 적극성을 보이는 걸 알 수 있다고 하셨다. SBS는 세월호참사 관련 댓글을 빅데이터로 분석하여 여전히 세월호참사에 대한 혐오표현이 끊이질 않는 상황에 대해 다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김언경님은 SBS의 댓글을 통한 혐오표현 지적이 독보였다고 한다. 악성 댓글을 통해서 2차 피해가 생겨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끔 하기 때문에 더 많이 다루면 좋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KBS는 다른 방송사들과 비교했을 때 세월호 10주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해상 안전불감증’을 부각하는 보도를 다루면서 세월호참사를 국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느껴지게끔 한다고 지적하셨다. 김언경님은 세월호 10주기 보도자료의 내용에 대한 아쉬움도 자아내셨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권고사항과 생명안전기본법과 관련된 보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불어 반복되고 있는 사회적 참사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지원 특별법 개정에 대한 부실한 보도를 지적하셨다. 마지막으로 김언경님께서는 KBS의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불방을 예로 들며, 방송장악의 폭력적인 현실을 비판하며 마무리하였다. 발제 2 : 미디어를 통한 간접외상에 대한 탐색적 연구 연세대학교대학원 상담코칭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영주님의 발표가 두 번째로 이어졌다. 이영주님은 이태원참사 뉴스 노출에 대한 탐색적 연구를 통해 간접외상을 겪는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정서적, 인지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더불어 간접외상의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는 요인들을 밝혀내고 그 결과를 통해 정신건강에 도움을 줄 방안을 탐색할 예정이라고 하셨다. 연구자로써 간접 외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잘못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한다. 이 연구를 통해서 뉴스에서 일어나는 재난 관련 뉴스의 노출이 심리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밝혀주는 토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셨다. 이영주님은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위로’라는 키워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89문항의 설문조사와 심층적 설문조사를 통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밝혔다. 이번 년도에 연구를 완성하여 국제포럼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발제 3 : 언론의 세월호참사 보도에서 이태원참사 보도까지  1부 마지막 순서로 세월호참사 현장기자였던 시사IN 기자 김은지님의 발제가 있었다. 김은지님은 세월호참사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와 어떤 변화가 더 필요한지 설명해주셨다. 세월호참사 보도의 문제를 5가지로 나열하였다. 사실 확인이 부족한 받아쓰기식 보도, 비윤리적이고 자극적·선정적인 보도, 권력편향적 보도, 본질희석식 보도와 기사회하지 않은 누락된 보도 혹은 의미가 축소된 보도로 분류하여 설명하셨다. 피해자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고, 특조위 세금도둑·폭식투쟁·탈맥락화 보도들은 세월호참사의 피해자들을 고립시켰다고 지적했다. 또한 해프닝성 보도도 계속해서 피해자와 시민들의 연대를 막았다고 하셨다. 다행히 세월호참사 이후 재난보도준칙이 제정이 되어, 현장기자에게 무리한 취재나 제작을 요구하는 걸 막을 수 있었고, 현장 기자가 데스크의 지시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소개했다. 이태원참사보도는 세월호참사보도에 비해 나아진 면이 있지만, 결코 좋은 상태라고 판단할 수 없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김은지님은 사회적 참사 보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사회적 참사는 사건 당일만으로 한정지을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와 유족이 공동체와 계속해서 연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바뀌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하는 것이 사회적 참사를 보도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2부 진상규명과 국가의 역할 2부에서도 세 분의 발제자들의 발제가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언론보도에 대해 논의했다면, 2부는 재난피해자 권리보장이 사회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고, 어떠한 부분들을 중요하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발제 4 : 4.16 세월호참사 특별법에서 10.29 이태원참사 특별법까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 전수진님의 발제로 2부가 시작되었다. 전수진님은 10년간의 특별법안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후, 세월호참사 특별법과 이태원참사 특별법을 비교하고, 이태원참사 특별법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다. 10년간의 특별법안 과정을 보면, 4.16사회적참사 특조위 활동이 중단되고 한 달 뒤 바로 이태원참사가 일어났다. 너무나도 유사한 참사가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특조위과정에서 예방에 대해서 더 집중해야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셨다. 세월호참사 특별법과 이태원참사 특별법은 거의 유사하지만, 이태원참사 특별법안을 보면 세월호참사와 비교했을 때 권한이 더 줄어들었다는 점의 차이가 있다. 변호사 전수진님은 이태원참사 특별법 초안 내용과 달라진 부분에 아쉬움을 자아내었지만, 기억이 잊혀지기 전에 진상규명과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이태원참사와 관련된 정보는 계속 삭제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변호사 전수진님은 이태원 특별법의 아쉬움은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는 바이지만, 계속 이것을 비판하는데에 머물 수는 없다고 하셨다. 이제는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조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집중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이제부터 시작이고, 진정한 애도와 추모의 시작이다.   발제 5 : 행정독주는 어떻게 재난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가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임기홍님의 발제가 이어졌다. 임기홍님은 재난피해자들의 권리 침해 현상을 민주주의 퇴보(행정독주)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하셨다. 한국에서는 21세기 이후 행정독주 현상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로인해 재난피해자의 권리는 직접적으로 침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서 밝혀냈다. 임기홍님은 과거와 다른 참사에 대한 국가의 특징을 국가의 강화된 개입으로 보았다. 개입이 강화되면서 시민사회는 억압되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추모와 애도에 대한 제한들이 행정독주를 잘 보여준다. 사회적 추모와 애도는 사회적 지지의 토대이고, 피해자들의 정당한 권리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절차라고 짚으셨다. 국가의 개입 중 담론 생산도 포함된다. 담론을 생산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셨다. 시민들에게 참사를 국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행정독주는 유가족을 배제시킨다. 이태원참사 당시에 일어난 일만 보아도 유가족을 배제시킨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 마약 검사, 시신훼손 등 유가족을 전면적으로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결국 행정독주로 국가는 연대를 단절시키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행정독주와 민주주의 퇴보를 막기 위해서는 행정권력을 제한해야 하고 민주주의의 가치와 신념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셨다.   발제 6 : 재난, 국가, 사회 그리고 재난피해자 마지막 발제로는 이재민사랑본부 공동대표 김겸훈님께서 진행하셨다. 김겸훈님은 재난에 대해서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예방하고 준비해야하는지와 재난 발생 시 어떠한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다. 재난을 막을 수는 없지만, 예상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기에 재난에 대해서 끊임없는 학습을 해야 하고, 지속적인 축적과 검증 과정을 통해서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재난이 발생할 때에는 모두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난거버너스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셨다. 재난이 모두의 문제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재난에 관해서 모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재난이 나의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고 하셨다.   여섯 발제까지 재난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한 첫 번째 포럼이 마무리되었다. 6 발제 모두 풍부했고, 질의응답 시간에도 많은 질문들이 오가는 장이었다. 앞으로 진행될 포럼이 기대가 되며, 방송와 국가의 앞으로의 행보에 더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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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 : 가슴에 노란 리본, 마음에 새긴 약속
2016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참사가 어느덧 10주기를 맞이했다. 10주기 세월호 기억식은 안산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에서 진행되었다. 많은 시민, 유가족분들과 여러 인사들이 기억식에 참석해 주었다. 기억식 순서 식전 공연 이름을 불러주세요 추도사 기억 편지 기억 영상 상영 기억 공연 기억 합창 4.16 안전 문화 창작곡 수상자들의 공연으로 식전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이름을 불러주세요’가 이어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김동연 경기도지사, 이민근 안산시장,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 고 김수진 아빠 김종민님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은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면서 추도사가 시작되었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재해로부터 자유로운 바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달라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임, 인정, 사과, 재발방지, 의료지원 등 12가지 주요 건고에 대한민국은 응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했다. 늦어지고 있는 기억공원 건립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국민의 안전이 뒷전인 현재 대한민국을 지적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하겠다고 밝히며 추도사를 마쳤다.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님과 고 김수진 아빠 김종민님의 추도사에서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고 하지만, 10.29참사와 오송참사가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이 높을수록, 함께 힘을 모아 장벽과 부딪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추도사가 끝나고 난 뒤, 97년생 동갑내기 김지애님의 기억 편지 낭송이 있었다. 4.16참사를 겪은 후, 자신의 다짐과 생각을 별이 된 친구들에게 전했다. “하늘이 맑을 때 너희를 기억하고, 비가 올 때 너희를 기억하고, 별이 많은 날 너희를 기억하고, 꽃이 피면 너희를 기억하며 살아가려고 해. 너희 부모님들 곁에 서서 진실도 밝히고, 책임자도 끝끝내 찾아냈다고. 이제 이 땅에는 무책임한 정부로 인해서 벌어지는 참사는 없게 만들었다고 자랑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가수 박창근님의 ‘별되어 내리네’와 ‘미련’을 불러주셨다. 바로 이어서 배우 박원상님의 정호승 시 낭독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널 가슴에 묻으라고 한다 세상에! 너는 언제나 내 가슴에 살아 있는데 어떻게 가슴에 묻을 수 있겠느냐 엄마는 너를 가슴에 묻지 못한다 아빠도 너를 황량한 가슴의 들판에 묻지 못한다. - 왜 돌아오지 않느냐 정호승 - 마지막으로는 4.16합창단과 시민합창단의 기억 합창으로 기억식을 마무리했다. 기억 합창단의 마지막 노래로 ‘잊지 않을게’를 부르며, 합창단은 노란 비행기를 날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10년이 지날 미래에도 노란 비행기처럼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자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듯,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듯, 진실은 침몰하지 않듯, 세월호참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쁜 와중에도 200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4월은 따뜻하고 꽃이 피는 봄의 시작이지만, 304명이 별이 된 달이기도 하다.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 함께 하겠다는 말들이 많이 오갔고,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특별법 제정, 생명안전법 제정과 같은 요구도 잇따라 들렸던 기억식이었다. 기억식에서의 다짐과 약속이 기억식이 끝난 후에도 이어지면 좋겠다. 김지혜님의 편지 중, ‘나는 그저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나도 김지혜님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저 나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이렇듯이, 세월호참사, 이태원참사, 오송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다. ‘여전히 단단하지 않은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위해, 남을 위해, 미래를 위해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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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평화를 위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중
국제 분쟁이 일어나고 일상 속 변화를 실감한 순간이 있나요? 어떤 순간인가요? 나는 생일을 맞이해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서 깼다. 애타게 생일을 기다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일은 내가 태어난 날인만큼 소중하고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22년 나의 생일을 나는 차마 즐겁게 보낼 수 없었다. 생일 전날 새벽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뒤부터였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나의 생일날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정도가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쓸모없어 보였고, 점점 무기력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충격도 한순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혼자 걱정만 한다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로, 내 일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로서, 나의 활동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2주 동안 기숙사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제는 집보다 학교가 더 익숙하고 친밀하다. 그렇지만, 또 그만큼 외부 활동을 많이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안에서 나름대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갈 길을 만들어 갔다. 전쟁이 일어난 후, 학교 내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앉아서만 지켜볼 수 없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학생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깊이 엉켜있는 역사를 공부했고, 서방권 나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이 다루었다. 그 뒤, 다른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전쟁으로 인해 나타나는 참혹함과 불행함을 벽보에 붙여 알렸다. 외부 활동을 꾸준히 하기는 어려웠지만, 해바라기와 촛불을 들고 반전시위에 학생들과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 일상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갔다. 그렇게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어느덧 학교 내 반전 NGO에서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저희 NGO 소식이 궁금하시면! 관심이 있으시면! 🥰 인스타그램 : lets__peace / 이메일 : lets_peace@naver.com) 지금 평화가 가장 필요한 국제 분쟁 지역은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세계지도를 보면 조각 케이크처럼 아주 반듯하게 잘린 지역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이 그러하다. 하지만 아프리카가 처음부터 반듯한 국경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항해시대를 시작으로 수많은 서방권 국가가 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들은 금과 은을 얻기 위해 광산을 캤고, 끝이 보이질 않는 플랜테이션을 만들었으며, 아프리카 부족민들을 짐승 취급했다.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서방권 국가들의 무분별한 약탈과 만행을 저지른 시대가 대항해시대다. 그 당시 국부의 가치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보유하는지에 있었다. 그렇기에 유럽 열강들은 금과 은을 더 많이 얻기 위한 땅따먹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이 국부를 늘리는 땅따먹기에 불과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갈라진 땅처럼 조각조각 부서졌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부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열강들은 그들의 편의로 그은 국경선 안에 서로 다른 부족들을 강제로 거주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이 가지고 온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이념은 더 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켰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대륙은 분쟁 속에 있다. 외부의 세력에 의해 갈라진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할까. 부족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과 싸움은 계속 일어날 것이고, 갑작스러운 해방은 나라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조각난 땅 위의 삶은 굉장히 불안하고 무서울 수밖에 없다. 몇백 년간의 지배가 현재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이다. 너무나도 슬픈 건, 이러한 분쟁을 만든 나라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꼬여버린 실타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게 참 슬프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들은 다른 외부 세력으로 인해 땅이 갈라진 채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중 하나다. 그러한 나라들에 평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국제분쟁을 멈추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국제 분쟁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갈등이 전쟁을 낳는다.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과정이 존재한다. 가족 간의 갈등이, 마을의 갈등으로 번지고, 그것은 나라 안의 갈등으로, 결국 나라 간 혹은 나라 안의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과정이 빨리 일어나기도 하지만, 몇백 년간의 길고 긴 싸움 끝에 터지는 것이 전쟁이다. 그러한 전쟁을 우리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며,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처음에 나는 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좌절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전쟁이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켜도 막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어떤 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내 고민을 수업 때 털어놓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평화 시에 서로 간의 교류와 외교를 잘해야지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교류하려고 하고, 외교를 하려고 하니 해결이 되지 않는 거지.” 너무 와닿는 말이었다. 왜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만, 극한의 상황까지 가야지만, 그제야 행동하는 걸까.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민간인 차원에서도. 그렇기에 작은 실천도, 매우 소중하다. 우리 안의 평화를, 내 주변의 평화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쟁은 거대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작은 눈덩이가 커지고, 커져서 괴물이 된 것이 전쟁일 뿐이다. 작은 눈덩이가 산에서 굴러가는 걸 막는다면, 우리는 전쟁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당연히 시위 한 번이, 발언 한 번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모이고 모이면,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굵직한 사건들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굵직한 사건이 될 수 있는 건, 역사로 남을 수 있는 건 그전에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은 실천이 무의미하지 않다는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걸 계속 명심해야 한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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