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권리

IU의 Love Wins: 사소한 배려가 필요한 거죠
1 “Love Wins(사랑이 이긴다)”라는 구호는 2015년 미국에서 시작된 구호다. 2015년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후 각종 SNS에서 해시태그 형태로 사용된 말이다. 이 후 각종 성소수자 관련 행사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이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유명한 것은 2016년 올랜도 게이클럽 총격 사건.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역사적인 순간에도, 혐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 퀴어 퍼레이드, 퀴어 운동에서도 이 구호는 힘있게 외쳐지고 있다. 2 최근 가수 아이유가 이 구호를 노래 제목으로 삼아 화제가 되고 있다. 아이유는 자신의 팬들에게 이 노래를 바치며 지금까지 보내준 사랑에 대한 감사 표시라고 설명하고 있다(전문).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싶다면서 노래 제목을 <본인은>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우리 모두는 다 같은 시민이라는 뜻에서 <보통사람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념과 자본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사람이 먼저다>라고 한다면? 남자 가수가 자신의 팬들을 위해 나도 당신들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미투>라는 제목의 노래를 짓는다면? 운동의 구호란 이런 것이다. 언젠가는 원래의 의미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먼 시간이 오기 전까진 상처 받는 사람이, 말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3 나는 아이유가 이 말을 정말 몰랐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알면서도 이러는 거라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만약 몰랐다면, 혹은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 몰랐다면, 그냥 취소하고 “쏘리”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이유의 팬들 덕분에 몇 시간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사람들 입에 회자 되고 있다. 아이유의 팬들은 그 구호가 니들 거냐며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멈추지 않고 있다. 아이유는 지금 한국이 대혐오의 시대이며 분명 사랑이 만연한 때가 아님을 자신과 자신의 팬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현대미술인 걸까? 어떤 이는 언어의 전유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저 예쁘고 멋있어 보이는 말이니 가져다 쓰겠다는 태도도 분명한 잘못이지만 나는 이 일에서 한국 사회의 다수자들이 소수자들에게 보이는 배려 없음을 느낀다. 나는 이 일에서, 오랜 세월 장애인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지하철 엘리베이터에서 장애인들이 배제되고, 장애인이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것을 막는 경찰들의 모습, 장애인이 엘리베이터에 타려고 하면 눈을 흘기며 먼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버리는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을 가장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개신교인들이 성소수자들의 용어인 ‘커밍아웃’을 가져다가 크밍아웃 운운해가며 낄낄거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구조도 좋고 언어의 전유도 좋고 제도도 좋고 다 좋은데, 당장 내 언행을 누군가가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정도의 생각도 못하는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함께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대혐오의 시대를 운운하기 전에 이런 사소한 배려를 한 번쯤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성소수자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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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동성애 ~ 이동환 목사 출교 사건을 보고
(사진출처 서울신문.2022.07.16.) 1 동성애에 대한 성경 속 이야기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보는 성경적 근거는 이러하다. 우선 첫째로 『창세기』에서 신이 인간을 처음 창조할 적에 아담(남성)을 만들고 그 짝으로 하와(여성)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에 근거하여 이성애적 성 결합이 성경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성애적 결합은 모두 일부일처제여야 마땅하다. 신이 아담에게 여러 여성을 취하라거나, 그의 배필로 여성을 여러 명 만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안에서도 일부다처제나 축첩을 하는 남성 인물들이 여럿 나온다. 당장 유대 민족과 아랍 민족의 기원으로 언급되는 아브라함도 두 명의 여인에게서 각각 자식을 낳았다. 이에 대해 지금 우리의 기독교는 신약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구약은 이미 지켜진 옛 약속이기 때문에 구약을 반드시 근거로 들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둘째는 『레위기』 18장과 20장의 서술이다. 『레위기』 18장에는 가증한 풍속-신이 미워하실 풍속-으로 이성애적 결혼 관계를 기반으로 한 성관계 이외의 모든 성관계를 가증한 풍속이요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근친상간, 불륜, 태어난 아기에게 다른 신인 몰렉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 수간, 생리 중인 여성과의 성행위, 그리고 남성 간의 동성애가 가증한 성행위로 거론되고 있다.  『레위기』 20장에서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다른 신을 섬기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 불륜을 저지르는 자, 근친상간을 하는 자, 수간을 하는 자, 남성끼리 동성 성행위를 하는 자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남성 사이의 동성 성행위는 성폭력이나 성매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다소 논란은 있으나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저주 이야기가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문란한 성생활이고, 그 문란한 성생활 중 하나로 동성애가 언급되고 있다. 저녁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다. 롯이 소돔 성 어귀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서 맞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였다. "두 분께서는 가시는 길을 멈추시고 이 종의 집으로 오셔서 발을 씻고 하룻밤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길에서 하룻밤을 묵을 생각입니다." 그러나 롯이 간절히 권하므로 마침내 그들이 롯을 따라서 집으로 들어갔다. 롯이 그들에게 누룩 안 든 빵을 구워서 상을 차려 주니 그들은 롯이 차려 준 것을 먹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의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너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相關-서로 관계함) 좀 해야 하겠다." 롯은 그 남자들을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을 타일렀다. "여보게, 제발 이러지들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 그러자 소돔의 남자들이 롯에게 비켜서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 "이 놈이 저도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 우리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려고 하는구나. 어디, 그들보다 네가 먼저 혼 좀 나 보아라" 하면서 롯에게 달려들어 밀치고 대문을 부수려고 하였다. (표준새번역『창세기』19장 1~9절) 이상이 구약에서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다. 넷째는 『로마서』를 비롯한 신약성서 안에서의 동성애 관련 서술이다. 『로마서』는 사실상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도 바울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 하나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 승천 이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을 박해하다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이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 성립되기 이전이었다. 원래 사도(아포스톨로스 απόστολος)는 예수를 직접 만난 자여야만 했는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살아 생전에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의 계시를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바울의 사촌인 바나바의 중재로 결국 사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기존 유대교 가르침의 발전 정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베드로, 야고보 등)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와 단절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후자에 속했다. 『사도행전』에는 여러 사도들이 열심히 여기 저기 전도하다가 어쩌다 한번 모이기만 하면 이 문제로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이런 갈등의 주된 주제 중 하나는 유대교적 전통을 새로운 모임 안에서 시행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이 중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할례였다. 이 시기의 할례는 이런 식이었다. 어떤 성인 남성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로 선언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기를 꺼내어 테이블 같은 곳 위에 얹어 놓고 음경의 포피를 흑요석으로 잘라내는 것이었다. 일단 다 큰 성인이 다른 사람 앞에서 성기를 내놓는 것도 꺼림찍한데,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기 피부 일부를 잘라내고 피를 보는 일은 할례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도 썩 보기 좋은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가르침에 매력을 느끼고 모임에 참여하길 바라던 자들이 할례 이야기를 듣고는 모임에 참여하길 거부하고 떠나는 일도 있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에 할례를 포함한 유대교적 율법 전통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유대교와의 단절을 주장했다(『로마서』 2장 25절~29절, 『사도행전』 15장)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 유대교와의 단절을 주장한 사람들에게 유대교와 유대인은 단절의 대상이었고 속된 말로 ‘너무 설치는’ 사람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과 유대교의 단절을 선언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표준새번역『로마서』1장 24절~27절) 『로마서』 이외에도 신약 안의 여러 곳에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10절) -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다. 당시 코린토스 교회 사람들은 베드로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 파벌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매우 가슴 아파 하면서 두 번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먼저 보낸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다. 『로마서』가 비교적 이성적인 느낌이라서 “바울의 복음”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것과 대비되어 『고린도전서』는 교회의 분열에 대한 가슴 절절함과 비통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게 특징이다. 우리가 알기로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인 자와, 어머니를 죽인 자와, 남을 죽이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건전한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 복음을 선포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8절~11절) - 『디모데전서』의 “디모데”는 사람 이름이다. 디모테우스(Τιμόθεος)라는 인물로 사도 바울의 제자뻘 되는 젊은 교역자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젊은 교역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조언의 편지다. 다만 최근에는 이 편지가 진짜 바울의 편지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는 쪽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일부 진보적인 성직자나 신학자들이 “성경이 고의로 왜곡되었다”거나 “해석이 잘못 되었다 - 남색이 아니라 남창이다”라고 이야기하긴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아무리 이야기해도 성경적으로 동성애는 죄가 맞을 것이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성경 속에 거론된 여러 죄 중에서 왜 유독 “동성애”만 걸고 넘어지냐고 비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레위기』에 나오는 “새우를 먹지 말라”라던가 “두 종류의 원단이 혼합된 것을 입지 말라”고 하는 구절들을 그대로 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왜 동성애만 걸고 넘어지냐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창세기』 38장 9절에서는 남성의 자위행위를 죄로 규정하고 있고, 『디모데전서』 3장과 『디모데후서』 1장에서는 이혼과 재혼을 죄로 규정하고 있는데 몇몇 대형교회에 청년부, 아동부 등과 함께 돌싱부도 있는 것을 내가 여러 곳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더 거론하지는 않겠다. 또, 동성애를 포함해 성경 속에 거론된 여러 성적인 죄/일탈들은 거의 대부분 주체가 남성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근친상간의 경우에도 남성이 가족/친족 내의 여성(모친, 자매, 딸, 여자 조카, 장모, 처제, 며느리 등)을 대상으로 정욕을 품거나 성행위를 하는 경우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을 오로지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약에서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며 남자를 통하지 않고 말하면 머리를 밀어버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단에 따라서는 여성 목사도 존재하는 시대에 왜 동성애는 안 되는 것인지,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시원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린도전서』 11장 4절. 개역개정판) 2 동성애에 대한 현대 기독교 교단들의 입장 기독교와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교파는 물론이고 성직자, 신앙인 개개인에 따라 크게 다른데 완전히 죄라고 보는 입장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입장, 두 가지의 극단적인 축이 있고 나머지는 이 사이의 어딘가 점으로 존재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죄로 보는 입장에 가깝다) 실제로 미국 성공회 같은 경우는 동성애에 대한 입장 때문에 둘로 갈라져 있기도 하다. 동성애를 여전히 죄로 들고 있는 교단에서는 구약과 신약에 일관되게 동성애를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일관성이 있고, 또 성서무오설이라고 하는, 성경이 보여주는 구원에 대한 지침은 완벽한 것이며 일부 오류가 있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으나 대체로 큰 오류는 없다고 보는 생각에 그 근거를 두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의 글씨 하나하나는 모두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축자영감설도 존재한다. 흔히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를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하는 성서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적/시대적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부터 벌써 성서무오설은 그 논리가 깨진다. 성서에 오류가 없다면 역사적/시대적 변화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 시대적/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성서의 모든 문자에 동일한 가치가 있어서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의미가 서로 배치되는 여러 문장들에 대해 배경 설명 없이 오로지 문자/문장의 논리만을 이용해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신약 안에서도 어딘가에선 선행이 최선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선행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배치되는 문장이 존재하는 것은 대화에 상황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대적/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성경적 가치를 사회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으로도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 지 알 수 있다. 동성애에 대해 포용적/수용적인 기독교 교단에서는 예수가 동성애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그 근거로 든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현대 기독교는 예수교가 아니라 기독교다. 예수가 그냥 예수가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온 구원자이며 우리를 대신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한 희생자라는 사실 뿐 아니라, 신과 신의 아들(예수), 신의 말씀(성령)이 사실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삼위일체론, 언젠가 심판의 날이 오고 예수가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재림)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종말론까지를 전부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3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교로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는 말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60년대 이후 히피들 사이에서 유행한 예수 운동이 가장 유명하지만, 원래는 예수의 공생애부터 기독교 성립 이전까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 지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청년 예수가 진짜 자기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지칭했을지는 알 수 없다. 유대교의 개혁을 원했는지,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려 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파격적인 행보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말하고 있고 네 복음서는 모두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유대인 중의 보수파, 극우집단들이 청년 예수를 나무에 매달아 놓고 때려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사복음서 성립 이전에 쓰여진 사도 바울의 편지들이나 사도들의 말에 보면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매를 맞아’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유대인들)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사도행전』 5장 30절. 개역개정판)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사도행전』 13장 29절. 개역개정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장 24절. 개역개정판) 하지만 사도 바울 이후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무관심했다. 역사적인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또 하나의 신이요, 그 자체로 곧 신의 말씀이며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 이 세상의 나쁜 것들을 다 쓸어버리고 예수가 구원자요 희생자임을 믿는 자들만 살려주어 그들의 왕국 속에서 살게 하실 분이라는 것, 그것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모든 종교가 다 그런 측면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면 말만 할 줄 아는 이들만 많아져 집단 자체가 타락해 버린다. 어쩌면 고대부터 근대까지 (더 나아가 현재까지도) 유럽의 사상사라는 것이 기독교를 타락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역사일지도 모른다. 예수는 어차피 처음부터 베일에 쌓여진 채 알려진 인물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부정하지만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무슨 이유인지 되게 기분 나빠하지만), 예수는 끊임없이 사도 바울에 의해서, 교부(처치스 파더)들에 의해서, 성직자들과 신앙인들에 의해서 새로 해석되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지금 여기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맞는 예수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서 이전의 예수, 사도 바울 이전의 예수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간을 두고 기다린 들, 지금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심판과 재림이 이 세상에 당도할 리가 없다. 식민지 상황 속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보수화되고 배타성을 강하게 품게 된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라는 존재는 그 자체가 반역이었고, 그 시대, 그 민족과의 불화였다. 하지만 예수는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했다. 예수의 등장은 그 자체로 재림이고 심판이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증오와 배타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식의 배타성을 드러내지 않고는 짧막한 설교 하나도 못하는 불쌍한 종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에서 심판과 재림,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이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땡인 덧없는 공간, 거기서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죽고 썩어 없어질 우리네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우리 삶의 의미인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이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의 심판과 재림이 언제가 나타날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한국 기독교 안에서 사이비니 이단이니 정통이니 해가며 싸우는 것은 다 덧없는 일이다. 언젠가 불벼락으로 불의한 것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못 버리는 한, 내 눈에는 정통교회나 <나는 신이다>에 나오는 사이비 교회들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와 성직자, 신앙인들이 다시 예수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이 세상 만물은 자극이 없으면 가만히 있는다. 그게 물리적 법칙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 자체로 반역이고 불화인 사람들이 있다. 나는 성소수자의 존재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최근 감리교단(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성소수자에게 축복 기도를 했고, 성소수자 인권단체를 개설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를 절차적 정당성도 무시하고 출교 처분을 내렸다. (한겨레.2023.12.08.) 나는 이동환 목사의 존재가 심판이요 재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네가 감히 그 사람과 예수님을 동일하게 보느냐고 호통을 칠지도 모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 같은 것을 굳이 거론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출교를 명한 그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마음 속으로 정말 진실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리도 빈약하고, 사회의 이득도 되지 않는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진정한 진실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을 거부하는 그들에게 안타까움의 기도를 보낸다.
성소수자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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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를 가르칩시다: 한국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식
(MBC 에브리원 성지순례. 이미지 출처 MBC) 1 조선 중기의 일이다. 안동 사람 퇴계 이황이 한참 어린 학자 고봉 기대승과 인간의 감정과 윤리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편지를 주고 받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우선 두 사람의 학문적 깊이에 감탄하였고 자기보다 서른 살 어린 젊은 학자 기대승의 반론에 예의를 갖추어 성실하게 대답하는 퇴계의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그 때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퇴계와 동년배이고 퇴계와 함께 경상도를 대표하는 천재로 불리던 합천 사람 남명 조식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고향인 경상도에서만 거처를 옮겨가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윤원형의 세도정치에 대해서도 서슬퍼런 비난을 퍼붓기도 했고,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곽재우, 정인홍, 김면이나 재상을 지낸 이산해 같은 인물이 모두 조식의 제자였다. 조식은 퇴계와 기대승 사이의 논변에 감탄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近見學者。手不知洒掃之節。而口談天理。計欲盗名。而用以欺人。反爲人所中傷。害及他人。豈先生長老無有以呵止之故耶。如僕則所存荒廢。罕有來見者。若先生則身到上面。固多瞻仰。十分抑䂓之如何。伏惟量察。 지금 공부하는 자들을 보면 손으로 마당에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하늘의 이치를 입에 담으니 명성을 도둑질하여 사람을 속이려 하는 것이라, 도리어 사람에게 중상을 입을 것이고 그 해는 타인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선생은 큰 어른이 되어서 어찌 그런 것을 꾸짖어 그만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저 같은 사람이야 성격이 거칠고 독선적이라 찾아오는 이가 드물지만 선생은 몸이 남들보다 높은 경지에 있어 많이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들을 이제 그만 진정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남명의 말이 다소 과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지만 또 한편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 주변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간단한 예의도 차리지 못하는데 하늘의 이치며 인간의 도덕이며 올바른 정치 같은 고상한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 도리어 본인도 해를 입고 남에게까지 해를 입힌다는 말이 요즘 사람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주변은 커녕 자기 몸 하나, 자기의 본능 하나 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이미 보지 않았는가? 나는 그러면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떠올렸는가? 얼마전 우연히 접한 한 TV 프로그램 내용 때문이다. 2 MBC 에브리원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성지순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김제동, 김이나, 풍자, 송해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고 불교 승려, 개신교 목사, 천주교 신부가 속세를 체험하는 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관찰 예능이라고 한다. 지난 11월 14일에 방송된 3화에서 송산 스님, 유경선 신부, 차성진 목사가 출연했다. 세 사람이 이태원을 지날 때 차 목사가 LGBT에 대한 각 교단의 입장을 물었다. (방송 중 해당 내용)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흘러갔다. 주제를 먼저 꺼낸 차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성경을 따르는 사람이고 어쨌든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거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을 하거든요. 예를들면 이성애는 항상 올바른 형태로만 존재하나? 그렇진 않단 말이죠. 결국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그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예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던가 아니면 그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권 조차 부정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저는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누군가는 이 말을 들으며 ‘목사가 할만한 말이네’, ‘목사치곤 진보적이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도 말 자체도 예의가 없거니와 당사자 앞에서 한다니 더 예의가 없는 말이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자. “저는 기독교 믿는 분들이 제정신 같지가 않아요. 그치만 그분들의 인권을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진보적인 듯이 말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하는 말이라는게 늘 이런 식이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믿을 자유, 종교와 신앙을 강제로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 종교의 교리랍시고 세상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를 두고 굳이 레위기나 로마서의 구절을 들고 와 논쟁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는 교리나 사상의 문제 이전에 예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당사자 앞에서 죄가 어쩌고 인권이 어쩌고 하면 당사자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피하거나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아 보자.’ 내게는 이 정도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과 헌법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해가며 논쟁을 할 만큼의 체력도 시간도 없다. 그런데 가장 웃긴 건 이거였다. 유경선 신부의 말이다. “저는 종교인들한테는 이런 질문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왜냐하면 종교한테 물어 보는 사람들도 계속 돼요 안 돼요를 물어 봐요. 그런데 좀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 자연스럽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저기 나가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반대해서 나간거예요. 종교 안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긍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언론에서도 종교인들에게는 항상 답을 바라는, 종교인들 한테는 너무 폭력적인 질문이에요. 종교는 항상 윤리적인 답을 내려 줘야 하는 그런 게 싫다고 여러분이 말하면서도 자꾸 저희한테 그런 답을 요구 하는, 그런 사회적 통념이 저는 불편하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저희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면 잘 사랑할 수 있어요? 이런 방법을 물어 봤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들은 작사가 김이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거는 진짜 생각지도 못한. 성직자들에게 그런 걸 굳이 물어 보는 게 폭력적인 거라는, 성직자 입장에서는 우리한테 어쩌라는 거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거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정말 기가 찼다. 유 신부는 본인이 신부이고, 신부라는 이름으로 방송에 나온 이상 좁게는 가톨릭, 넓게는 기독교를 대표해 방송에 나온 사람이다. 애초에 그 종교에서 죄를 운운하지 않았으면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을 일도 없다. 자기들이 원인을 제공해 놓고 이제와서 자기들한테 묻는 게 폭력적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그리고 성직자가 이런 말에 답을 안 한다면 그들이 이 사회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소수자 반대 시위에 나간 것도 ‘자연스럽게’ 나간 거라니, 이 말도 정말 웃기다. 성소수자를 치료한답시고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는 언어적/물리적 폭력과 감금, ‘교정’이라는 의미에서 행해지는 성폭행들을 생각하면 저런 일을 자연스럽다고 평하는 유 신부의 말과 저런 말에 공감해주는 김이나 씨의 말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도 한다지만, 나는 그 말도 아니라고 하고 싶다. 무식도 때로는 죄가 된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세상을 나쁜 길로 끌고 가는 무식은 죄다. (기독교 교리 내에서의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기회를 두고 다시 논하고 싶다. 한국에서 종교나 신학을 전공했다는 사람들도, 성직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성경과 교리를 제대로 공부한 이가 드물다. 그들과의 논쟁은 내 체력 낭비일 뿐이고, 조만간 종교적 측면에서의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다시 논하고자 한다.) 3 우리의 근대화는 서구화이고 기독화였다.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이거나 기독화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창궐을 겪으면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며 기독화라는 등식을 가지고 살았다. 이런 가치관에 동의하건 말건 한국, 특히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 자체를 서유럽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고 인류의 역사가 오로지 그런 유럽적 체계가 지향하는 지향점을 향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 그다지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의 근본은 우선 무지(無知)다. 이건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고 배우지 않아 생기는 무지가 아니라 다양한 정보와 가치, 지식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아 생기는 비의도적인 무지다. 이런 비의도적인 무지는 한 문화권 안에서 상식이 되고, 이런 상식은 아무 막힘 없이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버린다. 지금까지 우리는 짧게는 70년, 길게는 백여 년 정도 동안 유럽 중심의 사고 방식과 그 우월성이라는 가치를 유무형의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늘 이집트 이야기를 하고 서유럽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근대 이전의 우리 삶은 전부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어도 서술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스스로를 변방으로 만들고 있고, 이런 사고 방식은 K-POP이 유행하고 한국 정부와 한국 문화의 일거수일투족에 전세계가 관심을 가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을 무슨 약소국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각설하고, 나는 성소수자 이야기를 하다가 왜 또 근대 이야기를 하는가? 성소수자에 대한 시각도 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없다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없었을까 하면 그건 아니다. 음양으로 세계를 설명하던 가치관에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기 때문에 음양이 결합하는 게 법칙이며 그러므로 음양의 결합이 아닌 동성애나 음양을 뒤바꾸는 혹은 음양이 뒤바뀌었다고 하는 트랜스젠더는 잘못된 것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모든 인간은 음양 이전의 태극이며 음양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각자의 행동에 달려 있으므로 음양으로 성性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세계에 기독교처럼 성소수자에 대해 혐오적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종교는 없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슬람권의 성소수자 혐오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유럽 근대 문명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명도 많다. 전근대 일본 역시도 남성간의 동성애와 동성 성관계가 매우 성행했으며 그것이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근대 이후 일본의 민속을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한 민속학자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国男, 1875~1962)는 동성애를 비롯해 비-이성애, 비-일부일처제 적인 성풍속에 대한 서술을 의도적으로 제외했다는 비판이 있다. 근대 이후 한국(조선)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비-이성애적 성행위는 점점 음지로 향해갔다. 특히나 1920~3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에로/구로/난센스(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의 준말)’라는 흐름은 ‘엽기’라는 말을 유행시킴과 동시에 비정상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구분하며 자신이 사회적으로 비정상에 속해 있지 않음을 안심시키고 비정상과 접촉했음을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로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냈고 이는 조선에도 퍼지게 되었다. 이 당시 일본에서 ‘에로/구로/난센스’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특히 여성 사이의) 동성애, 비정상적 성행위, 정신질환, 성적 암시 혹은 노골적인 성묘사가 들어간 글이나 그림, 사이비 종교, 매우 특이한 범죄 등이었고, 이것이 사실상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향을 결정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조선에 퍼지고 조선 내에서는 어떤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2018년에 나온 박차민정 선생의 『조선의 퀴어』라는 책을 추천한다.) 4 배우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을 한 게 2000년 9월이다. 그 이전에는 훈련소에 간 여장남자 이야기나 동성 성매매/원조교제, 여학생들 사이의 로맨틱/섹슈얼한 분위기 같은 것을 자극적인 흥미 소재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밀레니엄 이후, 한국 언론에서는 나름대로 차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성소수자들의 삶에 대해 다룬 적도 있고, 영화 <왕의 남자> 이후 일어난 드라마, 영화 작품에서의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동성애 붐은 수많은 작품 속에 동성애자(주로 게이) 캐릭터를 존재하게 했다. 하지만 수많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게이 혹은 남성답지 않은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그 와중에 여성 성소수자들은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퀴어 퍼레이드를 둘러싼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 이후부터는 퀴어축제는 물론이고 동성결혼/시민결합 합법화, 더 나아가서는 동성애에 대한 찬반을 다루는 방송도 많아졌다. 하지만 다루는 방식은 늘 비슷하다. 동성애는 변태성욕이며 죄악이고 불법화/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와 기독교 계열 운동가가 등장하고 성소수자에 친화적인 비-성소수자가 등장하고 이름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성소수자(홍석천, 김조광수 등) 한 명을 등장시킨다. 그 자리에 참석한 단 한 명의 성소수자는 어떤 기분일지 내가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는 이렇게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류의 방송을 보게 될 때마다 ‘저 한 명’, ‘저 한 명만’을 섭외한 이유가 무엇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 한 명은 방송 앞에서 너무 과격한 이야기를 자제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이 겪었던 피해 이야기 중에서 방송에서 언급해도 될 것과 언급해선 안 될 것, 도저히 언급하기 싫은 것을 계속 상기하며 구분해 말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섭외도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5 종교의 자유는 믿을 권리와 믿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종교 교리랍시고 아무 언행이나 일삼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한다. 이와 동시에 말하는 사람, 특히 성소수자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종교인들에게도 교리가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 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어 줬으면 좋겠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도 성소수자를 방패막이로 내세워 특정 종교의 거친 언행을 여과없이 내보내는 일을 삼가줬으면 좋겠다.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이 혹시 상처 받지 않을까,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상처 받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 우리는 그것을 예의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매너라고 하고 비속어로는 싸가지라고 한다.
성소수자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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