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3초의 장면을 위해 ‘마리아주’는 죽었다

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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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이 각자의 가치를 존중 받는 세상을 꿈꾸며 동물자유연대에서 활동하는 캠페이너입니다

마리아주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네 살이었다. 약 2년 여 간의 경주마 생활을 뒤로 하고 말 대여 업체에 팔려간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주인공 말의 대역으로 드라마 현장에 투입된 마리아주는 낙마 장면을 위한 고의적인 연출로 머리부터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사고를 당했다. 심한 충격을 받고 쓰러진 채 바닥에서 내리 헛발질을 하던 마리아주의 발목에는 로프가 묶여 있었다. 촬영 신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한 마리아주가 겨우 몇 발짝 내달렸을 때 뒤쪽에 서있던 스텝 여럿이 로프를 힘껏 잡아당겼고, 마리아주는 고개가 꺾이며 고꾸라졌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말은 일주일 만에 목숨을 잃게 된다. 우리에게는 ‘까미’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퇴역 경주마 ‘마리아주’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방영한 드라마에서 마리아주가 등장한 시간은 고작 3초 가량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대로 끝나서는 안됐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벌어진 죽음을 마주하며 사람들은 예전부터 느껴왔던 불편한 감정을 떠올렸다. 그 사고는 단지 어느 운 없는 동물 하나에게만 일어난 예외가 아닐거라는, 슬프지만 분명한 짐작이었다. 모두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랐고 미디어 전반에 걸친 각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처음으로 사건을 공론화했던 동물자유연대가 ‘방송 촬영을 위해 안전과 생존을 위협당하는 동물의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리자 20만 명 넘는 시민들이 이에 동의했다. 그 결과 정부는 "2022년 상반기 중 ‘미디어 출연 동물 보호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현장에서 실행하도록 모니터링하겠다" 약속했고, 그 작업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그 후 1년 반, 여전히 제자리걸음 중인 미디어 출연 동물보호 가이드라인 

그러나 사건이 가져온 파장에 비해 변화는 미미하기만 했다. 협의체 구성원 중 대다수는 미디어 업계 관계자였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가이드라인 제작에 부정적이었다. ‘가이드라인’이라는 호칭 자체에 강하게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2022년 상반기에 두 차례 있었던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촬영에 동원한 동물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하는 동시에 현장에서 실행 가능한 범위를 파악해 실효성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작해보고자 했던 의도는 찾을 수 없었다. 본론은 꺼내지도 못한 채 고작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이유 만을 역설하기 바빴고, 지금은 그마저도 중단된 상태로 일 년 넘게 답보 중이다.

당시 업계 관계자들은 동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이 생기면 새로운 제약에 발목 잡혀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까 우려했다. 촬영 현장은 대체로 열악하기 마련이라 사람에 대한 처우도 엉망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쉽게 말해 사람도 힘든데 동물까지 어떻게 챙기냐는 뜻이었다. 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동물의 안전을 챙기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동물을 출연시키지 않으면 된다. 아직 가이드라인의 내용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만약 마련된다 해도 그 안에는 아주 기본적인 사항만 담길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안전을 위한 담당자를 따로 지정한다거나 대기 시간에는 동물이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 같은 것들 말이다. 고작 이 정도 항목조차 부담된다면 살아있는 동물을 촬영에 동원하지 않는 것이 맞다. 어떠한 영상물도 생명의 가치보다 귀할 수는 없고,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드라마 속 앵무새를 불태우는 장면. 출처 : SBS 캡처


가이드라인은 종착지 아닌 시작일 뿐

앞서 언급했던 마리아주를 이용한 낙마 장면이 방송으로 송출되자 많은 시청자들이 말의 안위를 걱정하며 방송국 홈페이지에 항의글을 남겼다. 촬영 과정에서 고의적인 사고를 일으켜 말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음에도 짧은 시간 출연한 동물의 안전을 우려할 정도로 시청자들의 인식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반면 촬영 관계자들은 현장에서 그런 사고가 있었음에도 해당 장면을 그대로 내보낼 만큼 동물을 이용하는 데에 무감각했다. 그곳에서 동물은 너무 오랜 시간 방송을 위한 소품처럼 다루어졌고, 말 한 마리의 죽음으로는 이를 바꾸기에 역부족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분노가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었건만 그토록 격렬한 흔들림에도 세상은 바뀐 것이 없었다.

이대로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마리아주의 죽음은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촬영 현장에서 희생되었을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동물들과 앞으로도 이어질 고통은 또 무슨 낯으로 마주하겠는가. 그러한 마음으로 동물자유연대는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미디어 출연 동물 보호 가이드라인’ 마련을 촉구하는 서명 페이지를 개설했고, 지금까지 5천명 가까운 시민들이 동참했다. 모아진 서명은 정부에 전달하여 조속한 가이드라인 제작을 요구할 계획이다.


제작부터 이러저러한 난항을 겪으며 그 완성을 간절하게 기다리게 되었지만, 사실 출연 동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은 우리의 종착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많이 기울어진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작점에 불과하다. 동물을 고작 ‘방송을 위한 소품, 흥미 유발 소재, 연출 도구’로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미디어의 동물 착취는 계속될 것이다. 미디어가 가진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 이제는 TV 방송 뿐 아니라 개인 방송, OTT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걸쳐 더욱더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만약 미디어가 지금과 같이 아무 제약도 없이 동물을 수단으로 마음껏 이용하게 둔다면 다른 분야에서 동물의 위치 역시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디어는 동물 권익 향상에 있어 상당 부분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반면 어떠한 측면에서는 동물의 지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미디어 출연 동물 보호 가이드라인’은 그 양날의 검을 올바르게 다루게 할 최소한의 장치다. 미디어가 동물을 인간보다 하찮은 존재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엄에 대해 더 많이 살피고 고려해야할 약자로서 여기며 감수성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그제야 비로소 마리아주의 이야기는 끝맺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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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물건이 아닙니다. 비인간 동물이 안전하고 존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미친나라 미친인간들 이렇게 아무렇지않게 동물학대하면서 편히 산다는건 악마들이지 사람인가요

몰랐던 일인데 너무 끔찍하네요...
이영원 비회원

공감합니다 동물 생명의 존엄성은 인간의 유희보다 위에 설 수 없습니다

김예림 비회원

?

노정민 비회원

공감합니다. 가이드라인 제정이 필요합니다.

‘미디어 출연 동물 보호 가이드라인’은 그 양날의 검을 올바르게 다루게 할 최소한의 장치다. 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생명을 저울에 재면 그 무게는 같습니다 시청률을 위해 제작진 배우 그 누구도 이 목숨 건 현장을 외면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잔인한 이들의 행위에 엄벌 바랍니다 인간은 벌을 받지 않으면 죄인지 모릅니다

너무 충격적이네요.. 기준이 따로 없다면 드라마 촬영팀 입맛에 따라 동물들이 막 죽게 되도 죄송하다는 말, 위로금으로 떼우고 또다른 여러 생명체가 죽어나겠어요..
가이드라인이 꼭 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씁니다. 저는 미디어 업계 분들의 목소리도 궁금합니다. 이런 사건을 반복되게 만드는 업계에 어떤 구조적인 문제가 있지는 않을걸까요? 비슷한 문제가 생겼을 때 '욕 먹으니까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서 정도라서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요? 가이드라인 제정되면 우리 사회에서 큰 걸음을 딛는 것일 테지만, 한 편으로는 한계성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인식 변화 없이 가이드라인에만 맞추는 걸로 면죄부를 쥐어 주는건 아닌지, 이로 인해 미디어 업계 종사자에게는 어떤 다른 영향이 있을지 등등 이후에도 우리 시민들이 꾸준히 두 눈 부릅뜨고 살펴 볼 문제라 생각됩니다.
저에게 당연하지만 잊고있던 것을 깨닫게 해준 중요한 사건입니다... 정말 마음 아프고요, 이 사건이 널리 퍼지며, 이후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꽤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관련 뉴스를 본 기억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데, 꼭 인지하고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작품성'이라는 명분 아래 생명에 대한 학대가 합리화 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들어 광고나 드라마를 볼 때 '동물들은 안전한 환경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등의 문구를 종종 보곤 하는데, 동물자유연대를 비롯한 단체와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여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명을 달리한 말의 이름 '마리아주'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네요. 할리우드 영화 엔딩 크레딧에 ‘No Animals Were Harmed’ 라는 문장을 발견하면 너무나 반갑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문구를 볼 수 있는 콘텐츠가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이드라인 제작에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이드라인이 꼭 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어 관련 업계에서는 비슷한 문제가 생겼을 때 '욕 먹으니까 하면 안 된다'는 정도의 인식이 퍼지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보단 단순히 비판 받는 것만 피해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왜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촬영 현장에서 동물의 권리를 지키는 게 당연하고, 그러기 위해선 어떤 방안들이 있어야 하는지 명시된 문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가이드라인의 성격상 준수를 강요할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이 마련되면 조금이라도 상황이 달라질거라 믿습니다. '콘텐츠 제작'이라는 이유로 동물 학대를 일삼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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