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우리는 '잘 듣고' 있을까요?

202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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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듣고, 잘 질문하고, 잘 말하려 노력하는 청년

2010년 05월 06일, 가능하다면 평생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제 삶 속으로 들려왔습니다.

“암인 것 같은데, 빨리 병원에 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꽤 진전이 많이 된 것 같아요.”

난생처음 듣는 말인데다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말이라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내가 암이라고? 다음 달이면 조기 취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게 말이 돼?”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가혹한 현실이었습니다. 

그 후, 총 4곳의 대학병원에서 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3기 후반입니다. 20대 초반이라 암 전이 속도가 무척 빠르니, 수술이 시급합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던 어느 날,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 왜 암에 걸린 거지? 도대체 뭐 때문이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런데 그 순간 지금껏 내 몸이 보내온 작은 신호들이 떠올랐습니다. 매일매일 미세한 열이 지속되었고, 계속 잠이 몰려왔고, 끝도 없이 피곤했으며, 감기약을 먹어도 좀처럼 감기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내가 내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그 시간만큼 암은 진행되어왔고, 암 세포의 크기가 점점 커졌단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내 몸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내 몸의 소리를 가볍게 여기며 무시했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듣지 않았던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많이 아파야 했습니다.

크게 아프고 나자, 세 가지 교훈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1. 삶에 어떤 순간이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니, 그때 그때마다 하고 싶은 말과 마음을 후회 없이 잘 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2. 몸의 소리, 마음의 소리, 타인의 소리 등을 “잘 들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
  3. 남 탓/상황 탓하지 말고, 나의 현실을 오롯이 인정 및 수용하며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

삶의 유한함을 깨달은 후, 나는 위 3가지 교훈을 잊지 않으려 적극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삶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부당한 것들에 대해 용기 낼 힘이 생겼고, 불편한 것들을 변화시켜야겠단 의지가 생겼으며, 내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지인들은 낯설게 느끼거나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꽤 오랜 시간 지속되자,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변화가 사회의 공고하고 단단한 벽을 만났을 때, 기성 질서와 부딪혔을 때-

변화는 갈등을 촉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 2024년 3월의 어느 날, 동묘 앞 다이소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다이소에서 구매한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 줄을 서고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내 차례가 되어 교환할 물건을 계산대에 올려놓던 순간! 갑자기 뒤에서 중년 남성 한 분이 새치기를 시도했습니다. 본인의 물건을 다이소 점원에게 건넨 후, 빨리 교환해달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저는 당황&멈칫하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라고 나지막이 불편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그 남성은 제게 “말이 많다.”고 했습니다. 남성의 태도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물러서지 않으며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라!” 단호하게 대응했고, 이후 제게 돌아온 말은 “그 입 닥치라” 였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본인 행동이 부끄럽지 않으세요? 왜 자꾸 함부로 말씀하시는 건데요! 왜 제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데요!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란 말이에요!”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분에 못 이기는 얼굴로 “그 입 안 다물어? 어린 게 어디서”라는 말과 함께 손찌검이 날아오려던 순간, 다이소 직원분이 급히 달려오셨고 주변 손님들도 한마디씩 하시자 그 남성은 조용히 다이소를 나갔습니다.

                                                            사진출처 - 빨간 코튼 양말을 들고 계신 분 사진 – Unsplash의 무료 사람의 이미지

만약 그 남성으로부터 손찌검을 당했다면, 직접적 폭력을 경험했다면, 그날 그 상황은 제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요? 다시 그 장소에 갈 수 있을까요? 앞으로 제게 생기는 부당한 일들에 대해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날, 듣지 않으려는(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떻게 폭력으로 발현되는지를 목격했습니다. 이 사회에서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는 이를 함부로 대하며, 자신의 위치성을 공고히 하길 원하는 심리가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졸업식에서 일어난 일명 ‘입틀막’ 사건 당사자 신민기씨는, 4월 9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습니다. 신씨는 당시 자신이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당했고, 대통령 연설이 끝날 때까지 다른 방에 가둬져 있는 등 헌법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며 헌재의 판단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를 구제받기 위해, 나를 비롯해 대한민국의 누구도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헌법소원을 청구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밝혔습니다.

 

                                                                         사진 출처 - '입틀막' 카이스트 졸업생 신민기, 헌법소원 제기 

역사를 돌이켜보면,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문서와 역사적 서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힘없는 피해자들의 경험과 목소리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진실에 대한 공개적 인정과 정의 실현도 가능했습니다. 생존자의 권리가 공개적으로 옹호되고 은폐되어 있던 잘못들이 공개적으로 인정되는 과정은, 정의로 나아가는 첫 걸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신민기씨의 말을 들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 제 삶에 강렬한 순간을 남긴 그 남성에겐, 최은정이란 사람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요?

▶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라!”는 제 목소리가, 그 남성의 귓가에 조금이라도 닿았을까요?

▶ 조금이라도 본인의 잘못을 인지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행동이 폭력임을 알았을까요? 

※ 그런데 이것이 제 삶에만 일어난 특별한 경험일까요?

※ 현재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문제와 이슈들이 제가 목격 및 경험한 것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어떤 이야기를 함께 나눠야 할까요?

        사진 출처 - 캐릭터 일러스트 대화 말풍선, 사무실, 군중, 사업 PNG 일러스트 및 PSD 이미지 무료 다운로드

4.10 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후보들은 한껏 몸을 낮추며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읍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넙죽 큰절을 올리기도 하고, 자신들이 부족했으니 기회를 달라며 간절히 호소합니다. 더 낮은 자세로 경청할 것이라고, 국민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선거가 끝나면, “진정으로 듣고자 하는” 국민의 대표는 잘 보이지 않는 걸까요?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민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도록 했지만, 우리의 대리인들은 국민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잘 듣기”가 되지 않아서 지금 우리 모두가 아픈 건 아닐지, 몸 속의 암세포가 자라듯 대한민국이 점점 병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사진 출처 - 경청, 잘 기울여서 열심히 들어라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 

저는 책 ‘진실과 회복(저자: 주디스 허먼)’ 중 일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부당한 사건들 앞에 ‘머 세상 일이 원래 그렇지’라고 자조하는 사람들은 이미 방관자가 된 이들이다. 폭력의 생존자들에게 방관자들의 공모와 침묵이 더 큰 배신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즉 우리가 피해자가 되면 친구들, 친척들, 이웃들의 무관심과 공모가 직접 당한 피해보다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이다. 독재의 규칙도 공동체의 암묵적인 허락과 동의에서만 가능하다. 즉,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존자 정의의 제1원칙은 공동체가 피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비가시화되고 암묵적으로 용인해온 각종 폭력을 공동체가 인정해야만 정의가 설 수 있다.”

“우리 안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 있는 억압 체계들을 해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무의식의 세계로 녹아든 억압 체계들을 낯설게 보고 불편하게 만들고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내는 것.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새로운 체계들을 창안하는 것”

             사진 출처 - [서평단모집(종료)] 진실과 회복 / 주디스 루이스 허먼 / 북하우스 (10명) 

제게 이번 4.10 선거는 그동안 자행된 폭력과 억압에 대한 불편함과 부당함을 표현하고 모아내는 장으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투표라는 국민의 목소리를 통해 공동체가 입은 피해와 상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국민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순간이 오길, 위태롭게 흔들리는 공동체의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길 염원하고 있습니다. 

투표를 통해 표현될 대한민국의 현재를 모두가 겸허히 인정하고, 그 안에 내재된 목소리들을 듣고, 모든 사람을 포함하며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새로운 체계가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렇게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길 바라봅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부당한 사건들 앞에 ‘머 세상 일이 원래 그렇지’라고 자조하는 사람들은 이미 방관자가 된 이들이다." 라는 말을 보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나는 과연 어땠을까.. 내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싶은...